데미안 다음으로 두번째로 읽은 소설이 되겠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밑에서.

사실 이 소설을 읽은 이유는 단순하다. 데미안과 책이 묶여서 나온 것이다. 데미안을 읽기 위해 빌린 책이라고 해서 데미안만 쏙 읽고 다른 소설은 읽지 않는다는 것은 왠지 역시 또 편식을 하는 느낌이기 때문에 나는 운명적으로 자연스럽게 이 소설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현대와 과거의 교육에 대한 모순은 비슷한 양상을 띄고 있는 모양이다. 본 소설, 수레바퀴 밑에서는 담담하게, 하지만 신랄하게 그때 당시의 교육을 까내리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한스는 그야말로 교육의 폐해에 당하여 아스라이 사라져간 비극의 주인공이다. 소설의 비유따나 수레바퀴 밑에 깔려버렸다.

한스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압박 아닌 기대 속에서 다른 즐거움을 모조리 빼앗긴 채 학업에 열중하며 그것이 자신의 삶인 양 살아왔다. 그리고 결국 자신에게로 전이된 아버지의 꿈인 신학도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그의 인생의 내리막길의 시작이었다.

헤르만 헤세는 자신을 비춘 인물들을 심어두어 주인공의 인생의 굴곡에 변화를 두고자 하는 성질이 있는 것 같다. 데미안에서의 데미안도 그렇고, 수레바퀴 밑에서는 데미안의 성격을 띄는 캐릭터로 헤르만 하일러가 나온다.

헤르만 하일러는 반항적이고 자아가 뛰어난 인물이다. 그의 그런 자유분방함은 한스의 자아를 일깨우게 되고, 한스는 결국 아버지의 꿈을 자신의 속에서 밀쳐내고야 만다. 하지만 평생의 신념을 손바닥 뒤집듯이 뒤엎은 것은 역시 문제가 되었다. 그의 정신적인 지주이던 하일러가 퇴학을 당한 후의 그는 고독했다. 결국 그 모든것을 견디기 힘들었던 그에게 학교는 정신적 문제가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는 휴양삼아 집으로 내려오게 된다.

하일러와의 우정이 풋내 나는 첫사랑 비슷한 양상을 띄었다면, 엠마와의 사랑은 불장난 그 이상이 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아버지로 인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법은 배우지 못한 상태였고, 엠마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떠나간다.

교장이 언급한 수레바퀴처럼, 그리고 공장에서 만지작거리던 톱니바퀴처럼 그는 수레바퀴에 치여, 굴러가기에 움직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시계 공장에 다니며 자신의 삶을 살고 있는 자신의 옛 친구 아우구스트의 모습과 대조되게 망가진, 항상 우위에 서 있었지만 그보다 아랫 위치에 서게된 자신의 모습을 아마도 그의 파티 속에서 끊임없이 비관했을 것이다. 그는 술기운에 결국 강 속으로 몸을 던지는 비극을 맞이하게 된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이 가라는 대로 가는 것 또한 능사는 아니라 생각한다. 편한 길을 찾아 가는 것보다는 모험적이지만 자신의 길을 관철하는 것이 역시 최고의 삶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과거의 나는 그런 점이 꽤 부족했다. 평범함이 최고라고 여기며 살아왔다. 그게 지금 발목을 붙잡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제 와서는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다.

이 소설은 헤르만 헤세 본인의 이야기를 각색하여 소설로 만든 것으로, 그의 과도기적 성장 심리가 많이 반양되어 있는 것 같다. 전반적으로 우울한 소설이었지만, 그래도 생각할 거리가 많아서 좋았던 것 같다. 그게 성장 소설의 묘미가 아닐까.

아무튼 이 책도 끝났구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