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초기작 중 가장 첫번째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사실 이 소설, 읽어본 것 같아.. 역시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망각이 되어 사라진 모양이지만, 이 책은 확실히 읽은 기억이 난다. 초반부의 가상의 작가 ‘하트필드’ 부분을 읽으면서, 옛날에도 똑같이 이 작가에 대해 찾아본 기억이 난단 말이지. 그렇다면 1973년의 핀볼도 읽었을 확률이 상당히 높다. 이 책에서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이 한번에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뭐, 이렇게 기억의 잔재를 긁어 모아서 ‘읽었었다’고 피력해 봤자 사실 전혀 의미가 없다. 내용과 주제가 의미가 되어 가슴에 박히지 않는 한은. 사실 그러기 위해서 이렇게 독후감을 쓰는 거고.

애초에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와 1973년의 핀볼을 다 읽고 나서 양을 쫓는 모험을 읽었더라면 훨씬 재밌었을텐데, 하고 후회를 해보지만 이미 지나간 일, 어쩌겠어. 나중에 경주로 돌아가면 양을 쫓는 모험을 꼭 가지고 돌아와서 다시 읽어봐야겠다. 하고 결심하는 것으로 그치자.

이 소설은 나와 쥐의 소소한 대화들의 묶음집과 흡사한 형태이다. 섹스가 없고 등장인물이 아무도 죽지 않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쥐와, 한쪽 손가락이 네개인 여자를 만나는 나. 그리고 제이스 바. 1973년의 핀볼에서 쥐가 떠나는 그 장소에서 그들은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반발하며 그렇게 20대 초반을 지나고 있었다.

이 소설의 끝은 담담했다. 나의 인생에서 한쪽 손가락이 네개인 여자는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나는 도시를 떠난다. 그리고 30대 근처가 되어 나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며, 쥐는 여전히 섹스가 없고 등장인물이 아무도 죽지 않는 소설을 쓰고 있다.

하루키의 소소한 문장 하나 하나의 의미를 곱씹는 게 즐거운 소설이었다. 1973년의 핀볼도 그랬지만, 그 소설에 비해 스토리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지. 그래도 담담하게 세계에 대해 사유할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이 소설, 사실 아주 조금 남겨두고 읽지 못하고 있었다. 토요일에 읽기 시작했고 그때 이미 거의 다 읽은 시점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현실에 치여서 끊임없이 번민을 반복하는 나는 책을 손에 쥘 용기가 없었다. 책을 손에 쥐지 않는 인생은 지극히 소모적이다. 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나로써는 힘겨운 일이었다. 하지만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찬 머리 속에 소설을 위한 공간을 또 다시 만들어낸다니, 상상만으로도 고통이었다.

그래도 오늘 조금 남은 이 소설을 다 읽음으로써 조금은 머리가 트인 느낌이다. 어찌되든 나아가야 할 일이다. 나아가며 아파하며 성장해야 한다. 이 소설의 글귀 한 소절이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밤이다.

우주의 복잡함에 비하면 우리의 세계 따위는 지렁이의 뇌와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