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긋한 하루를 보내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바로 독서. 독서 중에서도 전공과 관련되어 있지 않는 책을 읽는 독서가 느긋함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는 나이기에 마치 어떤 압박이라도 있는 것처럼 약간의 강박감을 가지고 이 책을 쥐었다.

오늘 알라딘에 가서 구매한 책 중 하나인 ‘어둠의 왼손’은 헤인 연대기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이다. 헤인 연대기이니까 당연히 르귄 누님의 책이고, 무려 4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지금(1969년에 발표되고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동시에 수상하였다.)에 와서도 곱씹어 봐야 할 정도로 좋은 주제를 갖추고 있는 소설이었다.

재미있게도 사실 이 책은 구매할까 말까 고민하는 정도의 책이었는데, 어스시 5편이 있었고 그래서 르귄님 책이니까! 해서 함께 구매를 강행했다. 그리고 막상 집에 와보니, 읽을만한 책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책은 바로 이 책이었고.(미미 누나의 크로스 파이어도 읽어야 하는데. 전공책이 아닌 책들을 계속 뒷편으로 밀어놓기만 하니 참.)

간단한 줄거리 설명. 겐리 아이가 늘 추운 행성인 게센의 가르히데서 에큐멘의 특사 신분으로 있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는 자신에게 호의적인 에스트라벤이 그에게 더 이상 도움을 주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저녁식사 중에 듣게 된다. 그리고 다음 날, 변덕이 심한 왕과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에스트라벤은 추방된다. 그리고 아이는 바라던 왕과의 대면을 하게 되는데 좋은 결과는 이끌어내지 못한다. 아이는 에스트라벤과의 대화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는 의미를 파악하고 오르고레인으로 움직이고, 추방당한 에스트라벤은 오르고레인으로 입국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 오르고레인에서도 아이는 에큐멘으로의 가입을 성사시키려 노력하지만 가르히데에서보다도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 때문에 농장(감옥)으로 가게 된다. 그리고 에스트라벤에 의해 탈출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길고 긴 빙원을 건너게 된다. 이 빙원을 통해 아이와 에스트라벤은 서로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빙원을 건너 가르히데로 가게 된 그들은, 아이는 에스트라벤의 충고에 따라 바로 우주선을 부르지만, 에스트라벤의 친구의 배신으로 인해 에스트라벤은 사망하게 된다. 결국 가르히데는 에큐멘에 가입하게 되고, 아이는 에스트라벤의 고향으로 가며 또한 거기서 에스트라벤의 아버지와 에스트라벤의 자식을 만나 빙원을 건넌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 책은 정말 긴 시간을 할애하여 ‘다름’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 나간다. 애초에 에스트라벤은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여 아이에게 자신의 뜻을 확실히 전달하지 못했고, 아이는 에스트라벤이 자신을 조롱한다고 여기며 그를 믿지 않는다. 그 불운은 빙원을 건너며 해소되지만, 에스트라벤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흥미로운 점은 르귄 누나는 자주 주인공으로 흑인을 내세운다는 점(겐리 아이는 흑인이다. 그리고 에스트라벤도 꽤 짙은 피부색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양성인인 게센인에 비해 단성인인 겐리 아이가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쉽게 폭력적인 성향을 띠게 된다는 점(남성 / 여성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폭력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겐리 아이는 굉장히 마초적으로 표현된다는 점(마치 남성의 표본 같은 느낌이었다. 꽤 자주 에스트라벤의 행동에서 조롱을 느끼며 에스트라벤의 여성적 측면을 강조하여 바라보며 ‘여성이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라는 일정한 선을 긋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게센인의 케메르 상태(마치 여성의 생리 주기와 비슷한 주기로 나타나며 성적 충동을 느끼는 시기. 임의로 여성/남성의 형태가 된다. 이들의 시점에서 보면 지구인은 항상 케메르 상태인 것이다..) 등, 생각할 부분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잘 정리되지 않는 기분도 든다 ㅋㅋ

게센인의 특이점으로 ‘시프그레소’라는 것이 자주 언급되는데 사실상 이 유별난 차이가 에스트라벤을 비극으로 이끌었다. 여기 시프그레소에 대한 설명을 그대로 옮겨보겠다.

시프그레소 : 아주 거칠게 번역하면 명예라고 옮길 수 있다. 기본적인 원칙은 다른 사람의 자존심을 지켜줌으로써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이다. ‘나를 존경하는 사람이 존경받지 못한다면 나 역시 존경받을 수 없다.’ 이 같은 미묘한 균형은 상호협약이 아니라 더 높은 위신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에 희생되기 쉬운데, 이처럼 타락한 경쟁 속에서 한 갠인의 자존심은 다른 이의 자존심을 희생시킴으로써 지켜진다. 시프그레소에 의해 조율되는 행동의 원칙들은 복잡하고 정교하며 말로 표현되지 않는다. 시프그레소라는 말 자체는 ‘그림자’라는 의미의 고어 이페그레에서 나왔다.

에스트라벤은 이 시프그레소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 아이에게 충고하는 일을 굉장히 꺼렸고, 그것은 그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굉장한 방해가 되었다. 그거에 더불어 아이가 에스트라벤의 의중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오해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상대방에 대해 알기란 2년의 시간도 부족한 것이 아닐 수 없다.(겐리 아이는 2년이 넘도록 게센에 머물렀다. 더군다나 그 동안 게센에 대해 조사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열린 마음으로 게센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커뮤니케이션의 문제가 있었고 초반에 아이는 에스트라벤을 불신했다.)

아무튼 재미있었다! 중반까지는 굉장히 질질 끄는 느낌이었지만, 다른 세계를 설명한다는 것은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인 것이다. 차근 차근 세계를 쌓아놓아야 후반에 이토록 큰 충격과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것이다.

한가지 안타까운 점은 문장이 대부분의 게센인들을 남성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세상에 없는 개념이기 때문에 해석이 어려운 것이겠지만 그래도 좀 더 조심해서 다뤄야 하는 사안이다. 바람의 열두 방향(단편집)의 겨울의 왕(역시 게센이 배경이다.)에서 르귄 누나는 미안하다며 실제 겨울의 왕이 발표될 때는 양성에 대한 개념이 없었음에도 모든 게센인을 여성으로 규정하고 지칭했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공평’을 위해서다.

중후반부터 줄을 그어서 사실 좋은 글을 많이 수집하지 못했다.. 좀 더 열심히 읽었어야 했는데. 아무튼 재밌었던 글 모음.

"당신 종족에서는 당신의 성과 이성이 어떻게 다른지 말해주시겠습니까?" 아이는 놀란 표정을 지었고, 사실 나도 내 질문에 놀랐다. 케메르 상태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같은 질문을 하게 한 것이다. 우리 모두는 내성적이었다. 아이가 말했다.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당신은 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요." 아이는 내가 아는 테라 단어를 사용했다. "당신이 가져온 사진들에서 봤습니다. 여자는 임신한 게센인을 닮았지만 젖가슴이 더 크더군요. 정신 면에서는 당신 성과 많이 다릅니까? 다른 종족입니까?" "아니요. 네. 아니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차이는 아주 중요하지요. 제 생각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큰 요인은, 그 사람이 남자로 태어났는가 여자로 태어났는가입니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그것은 그 사람의 기대, 행동, 사고방식, 윤리성, 태도 등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단어. 기호 사용. 의복. 심지어 음식까지도요. 여자는.... 여자는 적게 먹는 편입니다. 하지만 선천적인 차이와 후천적인 차이를 구별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심지어 여자가 남자와 똑같이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곳에서도 아이를 낳고 기르는 일은 여전히 여자들이 맡아 합니다..." "그러면 평등은 보편적 규칙이 아닙니까? 여자들이 정신적으로 열등한가요?" "모르겠습니다. 여자들이 수학자나 작곡가, 발병가나 철학가가 되는 건 드문 일인 듯합니다. 하지만 그건 여자들이 멍청해서가 아닙니다. 여자의 몸은 남자보다 근육은 적지만 인내력이 강합니다. 심리적으로는...." 아이는 이글거리는 스토브를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하르스, 여자가 어떤 존재인지 당신에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추상적인 개념으로 여자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고, 게다가, 맙소사!, 저는 사실상 여자란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습니다. 저는 여기에 2년 동안 있었습니다..... 그게 어떤 건지 당신은 모릅니다. 어떤 면에서 제게 여자는 게센인보다 더 낯설게 다가옵니다. 어쨌든 당신과 저는 한 가지 성을 공유하잖습니까....." 아이는 고개를 돌리더니 슬프고 불편한 듯 소리 내어 웃었다.
"배신이 아닙니다. 에스트라벤은 어느 한 국가가 먼저 에큐멘과 동맹을 맺으면 다른 곳이 자연히 그 뒤를 따르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시스, 페룬테르, 다도해 역시 뒤를 따를 겁니다. 그리고 통일이 이루어질 겁니다. 에스트라벤은 자기 나라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폐하. 하지만 카르히데나 폐하를 위해 봉사한 게 아닙니다. 에스트라벤은 제가 섬기는 주인을 섬겼습니다." "에큐멘?" 아르가벤이 놀라 말했다. "아닙니다, 인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