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픈 말이 많음에도 키보드 위에 손을 얹으면 왜 이리도 머리가 백지장이 되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이 소설은 나에게 재미와 충격과 슬픔을 쏟아냈다. 큰 파도가 아닌 차분하게 정제된 물결처럼.

늘 그렇듯이 읽게 된 경위부터 이야기. 이번에 위쳐를 다 읽고 다음으로 읽을 소설을 선택해야 할 때가 되었다. 저번에 예현이와 부산 여행을 함께 하고 돌아올 때 예현이를 위해 구매한 채식주의자가 눈에 띄였고 그래서 이 책을 펼쳤다. 결국 이 책을 읽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는 의미인데, 그만큼 흡입력 있었고 그만큼 나의 뇌를 놀릴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 책에 수록된 글은 총 세편이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 불꽃. 각각을 단편으로 봐도 되지만, 내용은 이어지는 연작이다. 각각의 글의 화자가 다르지만 관찰 대상자는 영혜로 동일하다.

글들은 평범함으로 가장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면면을 파헤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일단 채식주의자부터.

채식주의자는 영혜의 남편의 시점에서 발생하는 일들이다. 평범함으로 가장한 폭력을 무장한 영혜의 남편과 평범함으로 가장한 상처를 평생동안 안아왔던 영혜 사이의 문제는 영혜의 채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고기를 먹는 꿈으로부터.

육식을 하는 자신을 점점 혐오하게 되는 영혜의 모습은 평범함을 가장하고 사회 구성원으로 녹아들어있는 많은 아웃사이더들의 마음을 찌릿하게 만들었을 것 같다. 영혜는 원래 육식을 즐기는 가정에서 태어났고, 늘 육식을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여왔다. 하지만 꿈이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이 자신과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옷을 벗어던진다. 브래지어에서부터 시작해서 채식까지. 지금까지 ‘평범하게 살라’는 폭력에 맞서 싸우지 않았던 것이 후회된다는 듯이 격렬하고 처절하게 그녀는 채식을 고수하기 시작한다.

문제가 가장 심화되는 집들이 장면에서 그녀는 이번에도 강압적으로 그녀에게 다른 옷을 입히려 드는 그 모든 행위에 혐오감과 불쾌함, 나아가서 분노를 느끼고 그녀가 주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훼손한다. 이 과정에 이르기까지 남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평범함이라는 프레임에서 빠져나가려는 자신의 소유물을 점점 괴이하게 여기게 되고 그 자체를 혐오하기 시작한다.

평범한 결혼 제도를 평범하게 영위하는 것만을 바라던 남편으로썬 정신병원까지 들르게 되는 영혜를 껴안고 사는 것보다 이혼하는 것이 더욱 ‘평범한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리라. 그것은 마치 모든 단물을 빨아먹은 껌이 머리카락에 붙어 화가 난 꼬마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이 사실은 다음 작 몽고반점에서 드러나게 된다. 몽고반점에서의 화자는 영혜의 언니의 남편, 즉 형부다. 그녀의 형부는 비디오 아트를 제작하는 예술가로, 아내와 아들 하나를 둔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다. 겉보기에는.

이번에도 글은 날카롭게 결혼 제도의 흠을 끄집어낸다. 본래부터 그는 결혼과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영혜의 언니가 느낀 그의 평소 모습과 작품의 괴리감은 그가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자신을 온전히 표현해낼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준다. 그의 주체는 삶이 아니라 예술이다.

그런 그가 처제의 몽고반점 이야기를 듣고 예술 본능이 꿈틀대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에게 삶, 나아가 사회적인 구성물들은 그다지 의미 있는 어떤것이 아니었기에 예술 본능과 함께 평생 느껴보지 못한 성적 욕구가 솟아오른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사회인으로 적당히 코스프레 할 수 있는 능력조차 없는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그 성적 욕구를 폭력적으로 해소하는 모습으로 아웃사이더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다.

사회의 금기를 깨면서까지 그는 자신의 예술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혼자 나와 살고 있던 처제에게 자신의 요구를 드러내고 결국 첫 번째를 해내며 그는 절반의 성공에 이른다. 그 절반의 성공을 시도하는 와중에 그는 성적인 자극 하나 없이 예술에 온전히 모든 걸 쏟아붓는데, 그의 강렬한 욕구들의 원천이 예술이라는 점이 잘 드러나는 듯하다.

그리고 결국 그 욕구들을 참지 못한 그는 평범함을 모두 벗어던지고 예술의 완벽함을 기하기 위해 후배 j에게 요청. 하지만 그것도 결국 성공하지 못하자 그는 그 자신의 몸에까지 꽃을 그리며 예술을 향해 몸을 던진다. 사회적인 프레임을 모두 벗어던진 그들의 모습은 자유로움 그 자체였다.

몸에 꽃을 그리고 자신의 옷을 찾은 기분을 느낀 영혜. 그리고 꽃 속에서 욕구를 해소하며 만족감을 느낀 형부. 그들이 바라는 사회 환경은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으나, 다양성이 배제된 지금의 사회가 그들의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의 초탈한 그 완벽한 성공은 그의 아내의 등장으로 거울이 박살나듯 깨지고 만다. 그가 찍은 영상을 직접 눈으로 보고 만 그의 아내는 119에 신고를 하고 그는 결국 현실 세계로 돌아와야 했다.

몽고반점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순수한 이미지. 그것은 아마 영혜의 마지막 모습을 암시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 이야기 나무 불꽃에서는 그녀의 언니가 화자이다.

그녀는 그렇게 남편을 잃고 사람들에게 가십거리가 되며 가족들과의 연도 끊긴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들 지우 하나, 그리고 정신병원에 내맡겨진 영혜 뿐이었다.

영혜는 갈수록 사회반항적인 모습이 된다. 육식을 꺼리는 것을 넘어서 그녀 자신이 식물이 되고 싶어한다. 그런 그녀를 채식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또 다른 프레임을 씌우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채식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채식주의자로 뭉뚱그려 불리는 많은 사람들은 그 자신들의 본질을 박탈당하는 것이리라. 그것 역시 폭력이겠지. 그런 그들에게는 채식을 하는 ‘합당한 이유’를 강요하는 또 다른 폭력이 기다리고 있다. 마치 성소수자들에게 왜 소수의 취향을 고수하느냐고 묻는 것과 같은 무례한 짓이다. 그 무례함을 채식주의자에서 영혜의 남편, 영혜의 남편 직장 사람들, 영혜의 가족들까지 수차례 휘둘렀다.

아무튼 그녀는 자신의 본질을 찾기 위해 비정상적인 모습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들의 눈에는 정신병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정신병원 내에는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마치 채식주의자라는 프레임처럼 그들에게도 정신병자라는 프레임이 그들의 이름 끝에, 혹은 이름 앞에 수식어로 붙는다. 영혜 역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내적 항의를 끊임없이 표출하지만 결국 정신병자라는 다른 프레임에 갖혀 가지각색의 치료를 받게 된다.

사회 속에서의 고립. 그리고 병원 속에서의 고립. 그녀는 선택을 해야 했고, 돌아가고 싶다 병원에 남고 싶다 그 두가지 감정을 함께 들춰업을 수밖에 없었을테지.

그런 그녀의 모습을 ‘정상인’ 코스프레를 가장 잘 유지하고 있는 그녀의 언니가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어릴 때부터 지속적으로 폭력에 노출되어온 영혜를 기억하고 있는 그녀는 식물을 표방하는 영혜의 몸이 점점 갓난아기처럼 왜소해지는 것을 보며 그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어느새 그녀는 남편과 동생 사이에 있었던 일조차 성적인 이미지가 아닌 것으로 기억하게 된다.

자신의 아이를 버리고 하얀 새가 되는 꿈에 묘한 죄책감을 느끼는 것에서 드러나듯 그녀 역시 평범함이라는 모습 이면의 모습이 있다. 하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영혜의 모습을 이해해나가는 자신의 모습을 부정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정신병원에서 정상적임을 찾게 되는 그녀이지만 역시나 머리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녀는 평범히 직장을 유지하고 평범히 아이와 살며 평범히 자신의 자유로운 동생을 관리한다.

그녀의 동생이 완전히 어린 아이의 모습이 되고 나서야 결국 그녀 역시 영혜의 모습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 세계가 꿈이 아닐까, 하얀 새가 되어 날아간 그 꿈이 사실은 현실이 아닐까, 억압된 폭력 속에서 끊임없이 견뎌나가야 하는 현실 아닌 현실, 그리고 그녀의 동생이 현실에 끊임없이 반항해왔음을 인정한다.

정말 길게 썼는데, 그만큼 내가 느낀 점이 많았다는 거겠지? 그 모든 소수자들, 아웃사이더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책을 덮어야겠다.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