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무던히도 좋아하던 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련한 감정이 남아있다. 심심하면 수도 없이 읽고 또 읽던 책이었으니까. 샤벤형(정말 아련한 이름이네. 지금은 뭐하고 있을까.)이 한때 이 책에 빠져서 열심히 이런 류의 감성 자극 소설을 쓰곤 했었는데. 그리고 그 영향으로 처음으로 판타지가 아닌 소설을 내 돈주고 직접 구매했었는데. 그리고 한때 이혁이에게 빌려줬다가 넝마가 되어서 돌아왔던 책이기도 했고. 뭐 이런 저런 그랬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책이 바로 이 키친이다.

이번에 정말 오랜만에 이 책을 빼들게 된 계가는 바로 예현이와의 데이트. 비가 콰릉거리는 천둥을 동반하며 카페의 천장을 때리는 와중에, 카페 부부 안에서 노닥거리던 우리는 책을 조금 읽어보기로 했었다. 예현이가 빼든 책은 진격의 거인. 아마 그렇게 오래 읽진 않겠지 하는 생각에 나도 가볍게 읽을 무언가가 필요했다. 뭐, 바로 얼마 전에 언어의 정원같은 가벼운 책을 읽긴 했지만 요새는 높은 확률로 실용 서적만 읽고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읽을 책을 고르는 데는 꽤나 많은 고민이 필요하던 차였다. 그 와중에 눈에 띈 것이 바로 키친. 나의 과거를 함께 했던 책.

이 책은 뭐 말할 필요도 없이 유명한 책이니까. 간만에 읽어볼까 싶어서 뽑아들었다. 부엌을 사랑하는 여주인공과 아빠 아닌 엄마와 사는 남주인공. 그들의 기묘한 동거가 두 가지 단편 소설로 가볍게 드러난다. 그리고 마지막 소설은 앞의 둘과는 또 다른, 죽은 남자친구를 강에서 만나는 환상을 보여주는 이야기.

담담한 환상 소설이였다. 책을 덮으면서 든 생각이었다. 세 단편 모두 조용함 속에 환상을 가미하여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 평범한 듯 비범한 분위기에 아마 압도당해서 이 소설에 그렇게나 깊게 빠져들었던 것이겠지.

간만에 정말 정말 대충 읽으며 슥슥 넘어가는 독서를 해보니 꽤 즐거웠다. 그리고 옛날 생각도 나고. 비 내리는 분위기에 취해서 더욱 그런 생각은 깊어져만 갔다.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