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외딴방
한참동안 소설이란, 그 화려한 수식들이 가득한 글이란 내 마음 속 산 꼭데기에서 전혀 메아리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싸늘하게 시체가 되어버린 등산객이었다. 소설에 박힌 고정관념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지금까지 내가 겪어왔던 다른 소설들에 정경유착 되어 그 어떠한 비리로 변모되어 있었던 것이다. 쉽사리 손도 대지 않는 장르에 대해 이렇게 간편하게 ‘쉬운 글’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나의 오만. 나의 게으름.
아무튼 정말로 오랜만에 소설책을 집어들었다. 경주 집에 꾸려둔, 하지만 한참이나 관리하지 않아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먼지 쌓인 서책의 다보탑들(52랩 사장님이 인사하고 오라고 했던 다보탑은 내 옥탑 서가 속에 있었나보다.) 사이 사이를 돌아다니며 겨우 건진 책 몇권 사이에 이 책이 섞여 있었고, 가장 먼저 집어든 이유는 아마 책 꽤나 읽는다는 책장들에 빠지지 않고 끼여 있던 책 중 하나였기 때문이 아닐까. 신경숙. 익숙한 이름인데 생각하며 검색해 보니 ‘엄마를 부탁해’를 쓴 작가고, 표절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작가이다. 나의 관심사 밖에 있던 그녀의 책 한권은 그렇게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황리단길에서 엄마에게 손쉽게 쥐여준 기욤 뮈소의 신작 소설과 연계하여 읽을 수 있도록 내 서가에 있는 ‘구해줘’와 ‘사랑하기 때문에’를 찾으러 올라간 김에 가져온 책 꾸러미들. 엄마에게는 옹골차게 ‘소설은 읽지 않겠다’고 선언하듯 당당하게 올라간 내 몸짓이 마치 가을의 노랗게 뜬 벼처럼 고개를 숙인다.
한참 책을 읽다가 엄마에게 엄마 시대땐 ‘공장 다니면서 학교 다닌 사람이 많으냐’고 물었다. 본인은 그렇지 않았지만 꽤 많은 친구들이 그런 시대를 살았다고 말한다. 신기하여 찾아보니 신경숙 작가의 나이는 엄마보다 1살 위. 그 시대가 내 역사 속으로 새치기 하듯 파고드는 순간이었다.
책은 7,80년과 94년을 이리 저리 배회한다. 역사를 관통한다.
책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지만, 이 글을 소설이라고 소개해도 되나 겸연쩍어질 정도로 그 경계가 모호하다. 현재(94년이다)의 나는 묻어두었던 두려운 과거(7,80년이다)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공장과 외딴방으로 대변되는 산업의 시대. 산업역군으로써의 나. 쇠스랑을 우물에 빠뜨린 나. 큰오빠, 셋째오빠, 흰 새를 찍겠다던 외사촌. 그리고 희재 언니. 그녀의 글은 언제나 막혀 있는 듯 보이지만 댐이 작은 구멍으로부터 붕괴되듯 우수수 무너져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문학을 생각할 때면 주인을 응시하는 개의 사무친 눈이 떠오른다는 그녀의 글은 그렇게 사무친 시선으로 과거를 응시한다.
‘나’는 글을 쓰며 꿈을 꾸며 결국 희재 언니를 마주한다. ‘언니는 나의 장애였다.’고 그녀를 정의하는 ‘나’는 결국 그녀가 바로 자기 자신이었음을, 자신의 손으로 자물쇠를 잠근 그녀의 방 역시 자신의 외딴방이었음을 깨달으며 마침표를 찍게 된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신경숙 작가는 이렇게 글을 시작하고 마친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유신정권과 12.12 쿠데타, 광주 민주화 운동, 삼당합당, 문민정부와 삼풍백화점 사건을 훑으며 그녀의 글이 끝이 난다. 그 속의 처참함과 우울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임을 말하면서 끝이 난다.
소설책의 그 형식이 내가 답습하려는 형식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는 왜 외면만 해왔을까?
간만의 소설책도,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