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책을 샀다. 백의 그림자. 희다는 뜻의 백이 아니라 숫자 100, 많다는 뜻의 백이다.

왜 또 책을 샀으며, 왜 하필 또 소설책이냐고 하면, 주말을 마무리하는 입장에서 가볍게 한 권 읽어보고 싶기도 했거니와, 오늘 하필이면 들렀던 고요서사에 쌓여 있던 황정은님의 소설들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는 그 이후 우연찮게 이 책을 만나게 됐기 때문이다. 원래는 한강님의 ‘흰’을 사고 싶었는데, 어찌저찌 상황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다 보니 결국 내 손에 남은 책은 이 책, 백의 그림자였다.

아무튼 소설이다. 가볍게 읽을 수 있겠다, 라고 생각했던 내 속뜻은 물론 내용의 깊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도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그 누가 시를 내용적으로 가볍다고 하겠는가. 그저 눈을 거쳐 지나가는 텍스트의 절대적인 양이 작다는 걸 의미할 뿐이다. 솜이 물을 먹어서 자그맣게 말려있는, 일일이 햇볕에 말려서 즐겁게 솜의 원래 크기를 그저 가늠해 볼 수밖에 없는 그런 글이다.

백의 그림자. ‘그림자’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의 결은 그다지 매끄럽지 않다. 나의 표상. 나 자신을 표방하지만 온전하지 않은. 그리고 새까만. 빛이 없으면 그 모습을 숨기는. 그림자는 책의 주제를 꽉 잡고 놓아 주질 않는다. 그런데 백이나 되다니.

이 책은 은교와 무재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을 마치 부드러운 솜사탕을 머금은 듯 풀어나간다. 마치 행성을 도는 위성들처럼 엇나가고 다시 함께 도는 운동장 위의 그 날처럼 그들은 서로를 인식하고 서로의 궤적에 영향을 준다.

책은 ‘숲, 가마와 가마와 가마는 아닌 것, 입을 먹는 입, 정전, 오무사, 항성과 마뜨료슈까, 섬’의 순으로 전개해 나가는데, 늘 그랬듯이 나는 내 입맛에 맞는 주제 몇 가지만 건져올려서 이야기하고 넘어가 볼까 한다.

숲에서 은교는 처음으로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한다. ‘그림자가 덤불을 넘어 어디론가 뻗어 있었다’는 그 그림자는 입이 있는 쥐며느리가 무언가를 깨물듯이 발을 땅에 딛고 일어선 것이다. 무재는 은교와 그림자 사이를 훼방 놓는다.

무재는 시니컬한 듯 따뜻하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림자를 따라가 버렸다고 간단하게 말하지만, 은교에게 가마를 본 적 있냐고 묻거나 유곤 씨와 함께 술을 마시며 그림자들을 부대끼거나 등나무 잎을 삶은 물을 마시면 부부 사이의 금슬이 좋아진다며 능청스럽게 말하거나 정전일 때 전화를 해주거나 차가운 냉면을 좋아하지만 따뜻한 조개탕을 먹으러 함께 가 주거나 한다.

가마. 가마는 폭력이라고 주창하는 그의 말을 들어보면 전자 상가 속 자신들을 ‘내몰아야 할 대상’으로 완벽히 대상화하는 외부의 입장에 대한 그의 생각을 알 수 있다. 그 생각은 꽤 강렬해서 그들이 내몰아 다동 라동 계속 밀려 도망치는 것을 택하기 보다는 자기 스스로 상가를 나설 구멍을 찾을 정도다. 하지만 그는 항성의 둘레를 도는 행성만 공전한다고 생각한다. 위성이 행성을 쫓듯이. 결국 그는 차피, 차피, 어차피, 어차피, 속삭이는 등 뒤의 그림자에 시달린다.

하지만 은교가 그의 집으로 와서 마뜨료슈까 속 말할 수 없이 가벼운 본질을 부수고 나서야, 그리고 너무나 차가운 것을 먹이고 나서야 그 속에 있길 그저 거부하는 것을 차근 차근 그만둘 수 있게 된다. 섬에서 따끈하고 개운한 것을 먹고 난 이후 고장난 자동차와 그림자를 남기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말이다. 아마 나중에는 은교가 작은 밤을 딱, 딱, 껍질을 쪼개서 노란 알맹이를 꺼내 먹으며 올라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보지 않고 함께 깨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나에겐 가난과 사회와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가난이란, 사회적 지위란, 삶이란 모두 상대적인 개념인지라 너무나 쉽게 나의 이야기로 읽을 수 있었다. 다 읽고 난 후 저자의

밤길에

간 두 사람이 누군가 만나기를 소망

한다

는 말에서 위안을, 몽글몽글함을 느끼는 건 나 뿐만은 아닐 것이다.

뒤의 ‘행여나 있을 오독으로부터 이 소설을 지켜 내고 싶어하는’ 평론가만 없었다면 더 말랑했을텐데.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