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내가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간간히 궁금했다. 꽤 많은 책들에 둘러싸여 있던 어린 내가 가장 먼저 소장하게 된 책이 바로 어린 왕자였었는데. 그 때 기준으로도 굉장히 오래 된 책이라서 종이가 누렇게 변색된 것이, 아직까지 그 거칠한 질감이 손 끝을 스치는 것만 같다. 작은 이모가 준 책이었다.

불시착한 비행사와 다른 별에서 온 어린 왕자. 그 둘 사이의 묘한 우정의 감각이 어린 나에게도 저며 왔었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 ‘나’가 어린 왕자가 사라진 곳을 두 번 그린 곳에서는 그 때도, 지금도 여러번 두 그림을 번갈아 바라보며 마음 아파했다.

사실 어린 왕자는 책으로 처음 접한 소설이 아니다. 그 옛날, 컴퓨터 학원을 다니면서 타자 연습을 할 때 처음으로 마주했었다. 리스트의 가장 처음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빈번하게 선택하곤 했는데, 텍스트의 분량이 분량인지라 끝까지 완주한 기억은 없다. 오히려 윤동주 시인의 별 헤는 밤을 재빠르게 쳐버리고 1일치 타자 연습을 끝내곤 했다.

내용이야 워낙 유명하니 길게 이야기할 것은 없을테고.

어른들의 빈곤한 상상력을 모자 /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으로 표현한 부분은, 오히려 또 다른 경직된 상상력을 재생산하여 작가가 슬퍼했다는 글이 있었는데, 경각심과 변화는 또 다른 이야기인 모양이다.

소설은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함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수많은 어른들이 눈 앞의 형상에 급급하는 모습들을 계속해서 보여주고,(심지어 어른을 싫어하는 ‘나’조차도 당장의 삶, 비행기에 급급하곤 한다.) 그를 어린 왕자가 이상히 여긴다. 그 역시 자신의 장미와 같은 장미들을 보며 자신의 장미는 전혀 특별한 게 아니었음을 슬퍼하고.. 그 이질감은 여우를 길들이고 여우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비밀을 언급하며 깨지는데, 그것은 ‘바로 잘 보려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야.’

가치라는 건 대개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타인과 내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지극히 시각적인 것이 ‘가치가 있다’고 표현되곤 한다. 즉 타인이 존재해야 가치를 증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왕도 사업가도 지리학자도 그렇게 자신이 가진 가치를 증명하고 우위를 매기기 위해 타인을 갈구한다. 심지어 가로등을 켜고 끄는 명령을 이행하는 것조차 타인이 그 현상을 관찰하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가치는 발생하지 않는다. 사막에 우물을 가득 메워야 가치 있는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름답지 않다.

사실 어린 왕자와 나의 우정 이야기, 노란 뱀이 어린 왕자를 그의 별로 돌려보내주는 부분의 찡함 만으로도 굉장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어린 날의 내가 어른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동조했다면 지금은 어른이 된 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동조하게 된다는 점도 재밌다.

그리고 짧기도 하고. 사실 이렇게 단기적인 목표 달성에 안도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걸 이렇게 글로 써서 남긴다는 것도 어른이라는 증거겠지.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