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에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복잡다난한 심정을 그대로 텍스트로 그대로 Copy & Paste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컴퓨터가 아니었다. 반면 컴퓨터와 달리 감정이 있다는 점에서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2주하고도 며칠 전, 일요일에 부암동의 청운 도서관으로 가서 읽기 시작한 것이 이 책의 첫 장의 시작이다. 도서관에 간 김에 새로운 책을 읽어보자. 분명 그 때, 이미 읽고 있던 책이 내 가방 속에 버젓히 있었으나, 책이 잔뜩 쌓인 곳에 가니 내 가방 속 책은 이미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전, 탐방서점에서 김중혁님이 [그땐 시디 파는 법 같은 게 있었어요. 소설을 예로 들면, ‘김연수 안 보셨어요?’하고 안 봤다고 하면 ‘한국 소설은 김연수 안 보면 말이 안 되는데…’하면서 그 사람 자존심을 건드리는 거죠.]라고 언급한 부분이 있었다. 놀랍게도 텍스트로도 유효한 기법이었다. 내 뇌리에 남아있어서 결국 이렇게 김연수님의 책을 찾아 읽게 되었으니. 심리의 연약한 부분을 통째로 뜯어내고 그 사이에 강제로 새겨버린다.

그렇게 호기롭게 읽기 시작했으나, 그 날 읽은 것은 1/5가 채 되지 않는 분량. 스케줄을 이유로 안타까움을 남기고 나서야 했다. 그리고 그 다음주 주말. 나는 결국 책을 구매했고, 그날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저번주 토요일. 지금이 화요일이니, 어느새 3일이 지난 셈이다.

그런 이유로 책이 중간에 바뀌었다. 문장을 기록해놓는 쪽수가 조금 달라졌다. 뭐, 소소한 차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실물이 손에 있으니.

잘 쓰인 책은 꼭 역사를 관통하는 부분이 존재한다. 아마 삶과 지극히 맞닿아 있는 지점이 우리의 가슴을 동하게 만들기 때문이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이전의 백의 그림자도, 또 그 이전의 외딴방도 시대를 강하게 관통하는 주제가 활용되고 있으니. 원체 우리 나라 역사의 흐름이 급박하게 흘러갔고, 또 그 시대를 살아온 분들의 공감대가 버젓히 존재하니 기록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읽은 부분까지는 분명히 굉장히 로맨틱한 소설이었다. 90년대 운동권인 정민과 나의 연애담이 소소하게 흐르는 그런. 현실에서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은 사랑, 그런 묘한 경계선을 줄타기하는 그런 소설. 내가 좋아하는 느낌이기도 하다. 전형적인 이야기 속의 사랑일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서로를 아끼며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책을 구매해서 끝까지 읽고 보니 이 책은 단순하게 연애 소설이라고 규정지을 수가 없었다. 이야기의 굴곡이 상당하다. 더군다나 작가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이 뒷장을 넘기지 않으면 안되도록 강제한다.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숨기고 뒤에서 갑자기 짜잔- 하고 드러내는 형식을 꽤 빈번하게 사용한다. 결국 하루만에 다 읽은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의 등장인물은 하나 하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오직 나만이 그들을 잇는 선으로써 존재한다. 나의 할아버지부터 시작하여 정민. 정민의 삼촌. 베르크, 정교수, 이길용(강시우), 레이 등. 오히려 큰 갈래를 담당하는 등장인물은 나의 곁가지들이다. 이야기의 도입부부터 3D 입체 사진으로 대표되는 할아버지가 등장하고, 정민은 자신의 삼촌의 매개로 동작한다. 그리고 전대협의 예비 대표로 독일 베를린으로 넘어가고부터는 아예 다른 축이 등장한다. 베르크 씨. 그리고 그 주변으로 정교수, 레이를 통하여 강시우, 결국 강시우가 등장하며 이들의 이야기 하나 하나에 선이 모두 이어진다.

‘나’가 정민과 함께 누워 우주를 바라보며 ‘내가 몇번이나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그 날의 그 몸이 바로 나라면 그런 공간도 단 한 곳 뿐이었고 그런 순간도 단 한 번 뿐이었다.’라고 말했듯 그들은 서로 엮이고 엮이며 그 단 한번의 기회를 뚫고 어딘가로 나아간다.

하나 하나 모두 언급하자면 너무나 이야기가 길어지니 모두 모두 생략해버리자. 그들은 3d 누드 입체 사진과 마약과 남양 군도와 섬 등이 범벅되어 강시우, 즉 이길용의 양심 선언으로 그 방점을 찍는다. 이리 저리 얽히고 섥힌 이야기가 한 갈래가 되는 지점이다. 견우와 직녀가 만나는 순간이다. 누군가에게 보내기 위해 보낸 그 수많은 s들이 한 장에 쓰이는 순간이다.

‘나’는 마지막에 정민에게 편지를 쓰며 다음과 같이 쓴다.

편지의 끝에 나는 서로 체온의 힘을 믿었던 모스크바에서 벤야민이 아샤 라시스에게 읽어준 주름살에 관한 문장을 옮겨적고 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는 그가 사랑하는 여인의 ‘결점들’, 한 여인의 변덕과 연약함에도 애착을 갖는다. 그녀의 얼굴에 있는 주름살과 기미, 오래 입어 해진 옷과 삐딱한 걸음걸이 등이 모든 아름다움보다 지속적이고 가차없이 그를 묶어놓는다.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 그런가? 감각들이 머릿속에 둥지를 틀고 있지 않다는, 다시 말해 창문과 구름, 나무가 우리 두뇌 속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보고 감각하는 바로 그 장소에 깃들고 있는 것이라는 학설이 옳다면, 사랑하는 여인을 바라보는 순간 우린 우리 자신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고통스럽게 긴장되고 구속되어 있다. 우리 눈을 못 뜨게 하면서 감각은 한 무리의 새떼처럼 그 여인의 눈부심 속에서 펄럭이며 날아오른다. 잎이 무성한 나무에서 숨을 곳을 찾는 새들처럼. 그렇게 저 감각들은 안전하게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그늘진 주름살 속으로, 매력 없는 행동과 사랑받는 육체의 드러나지 않는 흠들 속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그 곁을 지나가는 그 누구도 이 결점들, 이 흠들 속에 덧없는 사랑에의 동요가 둥지를 틀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
그렇다. 학설이 옳다면, 우리는 가끔씩 우리 자신의 바깥에 존재한다.

시대의 결점 속, 그 속에 존재하던 장소, 물건에 그 때의 우리가 남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우리의 존재 유무와 관계 없이 늘 역사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재밌었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방식은, 정말 놀라울 따름이니 누구에게라도 한번쯤 꼭 일독을 권하고 싶다.

아. 아쉬운 점은 레이가 강시우의 장식으로만 존재하는 느낌이 강했다는 점. 굉장히 까슬거리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