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세계의 끝 여자친구
다음 소설은 분명히 황정은님의 ‘계속해 보겠습니다’가 될 줄 알았는데. 늘 그렇듯이 내 예측은 정확도가 굉장히 낮은 편이었다. 결국 읽은 책은 세계의 끝 여자친구다.
김연수님의 글도 나와 굉장히 궁합이 잘 맞는 편이었기 때문에 다음 책을 골라둔 것은 필연에 가까웠다. 리디북스에서 다른 책들과 함께 구매한 책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읽어보리라 생각했던 책. 이름부터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책이었다. 이전 책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덕분에 그다지 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지 않고 구매했는데, 펼치고 보니 단편집이다. 더군다나 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장편이 나오기 전에 쓴 동명의 단편이 포함되어 있는. 이 책의 다음 책으로는 당연히 이 책을 읽어야 하지 않겠어? 하며 누군가가 나에게 건넨 것처럼.
그리고 또 하나의 우연이 있다면, 김연수님의 특유의 감정선이 내 현재 심정과 굉장히 잘 어우러졌다는 점이다. 그의 글 속에 계속해서 언급되는 ‘아픔’, 그리고 ‘세계의 이어짐’은 할아버지가 쓰러지셔서 경주로 내려가는 내 심정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단편은 모두 9개로, 각각 모두 다른 지면에 실린 단편들을 긁어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이 책의 출판 시기는 아무래도 이전 책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각 단편 속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픔이 마치 눈에 보이는 듯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그 첫 번째 단편,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에서의 두 여성의 아픔의 공감으로 내면의 불을 쓰다듬는 과정이라거나, ‘기억할 만한 지나침’에서 죽음으로 새로운 세계에 닿은 시체의 고통처럼 외부의 세계에 닿음으로써 이전의 자신으로는 상상하지 못했던 고통을 받는 주인공,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서의 여자친구와의 세계가 그녀의 집에서 겨우 30분 가량밖에 확장되지 못했던, 그래서 지극히 좁고 작았고 그래서 고통스러웠던 시인 등.. 단편 하나 하나에는 모두 고통이 서려 있다.
고통이라는 작용이 차츰 신기하게 다가온다. 변화의 과정으로 있는 걸까, 혹은 변화의 목적으로 있는 걸까. 그 부산물일까, 그 완성품일까.
단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고통 앞에서는 평생 가졌던 신앙마저도 진통제가 먼저 몸속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나는 엄마 덕분에 삶과 죽음 사이에는 고통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고통.
주인공은 엄마의 그 지극히 개인적인 고통이 자신을 뚫었고 노을로 실체화했으며, 그래서 백합을 버린 남편의 무공감이 무소통으로 느껴진다.
그 밤에 남편이 내게 던진 질문은 두 가지뿐이었다. 그 사람에 대한 책을 왜 내가 써야만 하느냐, 자신을 사랑하느냐. 남편의 질문은 결국 남자란 동물은 대단히 부적절한 순간에 사랑을 확인하려 든다는 사실만을 내게 알려준 채, 어떤 대꾸도 듣지 못했다.
그의 지극히 하찮은 시기심은 그녀의 아픔에 조금도 다가서지 못한다.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 접촉할 수 있는 방법을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던 그녀는 꽉 막힌 도로 중간에서 남편에게 절규하듯 이혼하자고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아픔과 지극히 닮은 사진작가의 글을 위해 일본으로 떠나고, 그의 행적을 쫓으며 ‘평생 잊지 못할 노을’을 쫓는다.
그의 글은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보채지도 않는다. 그저 아픔을 훑고, 아픔들을 이어붙이고, 잘 엮어서 마치 그 틈새에 내 아픔도 엮어볼 수 있을 것처럼 유혹한다. 그렇게 세계와 세계를 잇는다.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하며 책을 끝낸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사랑해 마지않는 단편집이었기 때문에 더욱 즐거웠다. 세계와 세계를 건너는 심정으로 단편 하나 하나를 꼭꼭 씹어 삼켰더니, 다음 단편으로 넘어가는 것이 지극히 고통스러웠다.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