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은님의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 대체 뭘 계속해보겠다는 걸까. 의문을 남기는 문장이다. 의문이란 흥미를 이끌어내는 원초적인 감정으로써, 생각할 여지를 완전히 닫아버리는 완벽한 완성은 상상력의 제한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썩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이전의 백의 그림자에서 대화의 미려함이 돋보였던 기억 때문에 이번에도 대화는 물 흐르듯이, 하지만 뭔가 세상과 동떨어진 느낌으로 표현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었지만 백의 그림자만큼 몽환적이진 않았다는 느낌.

뭐, 아무튼.

계속해보겠습니다.

책의 주축은 물방울이 하나 된 것처럼 어우러지는 소라, 나나, 나기 셋이다. 그들의 어떠한 결핍이 그들의 어린 시절을 가득 메웠는데, 그걸 메꾸기 위해 물방울에 물방울을 보태고 보태다가 섞이고 만 것이다.

나기가 너무 조그맣다, 왜 이렇게 조그매, 제일 조그매, 맘에 안 든다는 둥 말하며 나기라는 물방울에 물방울을 보태고 보태다가 섞이고 말았다. 세개의 물방울이 뭉쳐 조금 더 큰 한개의 물방울이 되고 만 것이다.

소라와 나나의 결핍은 그녀들의 어머니, 애자로부터 물려받은 어떠한 유산이다. 애자는 그 이름부터가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녀는 자신의 몸의 일부가 된 남편, 금주씨를 공장 톱니바퀴에 잃고, 몸의 일부를 잃어버리고 텅 빈, 다만 있다,의 상태가 된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잃어버린 통증, 삶과 죽음의 경계를 유산으로 남긴다.

소라와 나나가 그 유산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다루는 지점이 흥미롭다. 소라는 자신의 타인과의 결합을 포기함으로써, 나나는 타인과 결합하지만 애자와 같은 형태의 전심전력을 경계함으로써 ‘애자같아짐’을 거부한다. 하지만 소라와 나나는 그를 통해 ‘애자같아짐’에 점차, 점차 다가서는 것이다.

사랑뿐이던 애자는 그 사랑을 잃자 껍질만 남은 묘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소라는 은연중에 임신한 나나를 가엾어하며, 그리고 나나의 아기와 자신을 동일시하며, 나나는 타인의 고통을 마치 검은 금붕어를 괴롭힐 때의 심정처럼 무감각하게 받아들이며, 그렇게 결핍을 드러낸다. 애자화 되어간다.

그리고 그들을 묶어주는 존재, 나기. 마치 거울의 상처럼, 상상할 수 없으므로 없다고 생각하기가 쉬운 집의 구조처럼.

나기는 평범함을 부끄러워하며 평범하지 않은, 폭사하는 그를 그리며, 빠진 이를 고치지 않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지극히 껍질에 가까운 그. 지극히 껍질에 가까운 애자와 닮은 그. 하지만 딸기는 껍질의 경계가 모호해서 먹지 않는.

모두 경계에 갇혀서 경계로서 존재하는 모호한 등장인물들. 그들이 물방울을 더하고 더해서 하나가 되어가는 것이 부드럽게 내 몸을 녹인다.

지극히 평범한 존재, 결핍을 허용하지 않는 세상을 대변하는, 나나의 아기의 아빠, 모세를 통해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함을 다시금 확인한다.

아저씨, 하고 부르고 나를 바라보는 것을 확인했다. 다시는 나나를 건드리지 말라고 그 눈을 향해 말했다. 소라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내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한번 더 그렇게 하면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해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 그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소라나나나기나비바. 하나의 큰 물방울이 된다.

그나저나 정말 큰 달이었지. 언제고 정말 달이 그 정도로 다가온다면 지구는 망하겠지. 달이야 아름답겠지만 나나도 지구도 역시, 망하겠지.

끝을, 경계를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결핍을 포용한다.

그건 그렇고 책이 끊임없이 소리를 내뱉는다. 위위위위위, 쐐쐐쐐, 자그자그자그. 책에 대고 소리 없이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