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따라 소설에 손이 많이 간다. 영화에서 시작한 그 해석의 묘미가 소설에까지 옮겨붙어 활활 타고 있는 모양이다. 이 책에서도 ‘사그락사그락 꺼져가니께 안심하구 있다가 난중 보면 원젠지 몰르게 확 퍼져버려’라고 산불을 표현하고 있는데 딱 그 짝이다.

이번에 읽은 책은 처녀치마. 단편과 술에 강하다는 권여선님의 첫 번째 단편집이다. 04년에 나온 것이 14년에 재간 되었고 지금은 19년이니, 꼬박 15년을 버티고 나와 만난 책이다. 역시나 옛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지점이 많은 책이기도 하다.

작가에 대해 궁금해서 인터넷을 찾아보면, 작가가 유독 술을 좋아한다, 그리고 작품마다 술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과연 그렇다. 글에서 꽐라가 되어 들어온 동생이 내 방에서 추근덕거리며 풍기는 냄새가 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지극히 남성적인 시각을 쉽게 쉽게 끌어와 글 사이 사이에 숨겨두는 것은 아무래도 그런 편력 덕분일 것 같다. 술자리란 남성들이 자신들의 남성성을 뽐내고 또한 핥아주는 남성집단을 대변하는 그 어떤 전통과 같을테니까..

계속 어필하지만 나는 단편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 짧은 글 안에서 쉽게 끝맺고 메시지 복합적이지 않은 편이라, 늘 시간이랑 아웅다웅하는 나로써는 쉽게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단편집이라고? 읽어보지 않을 수 없다.

라고 자신만만하게 읽었는데, 그 자신감이 무색하게도 어렵다, 어려워.

이 책은 단편이 할 수 있는 그 모든 압축 기술을 사용해서 내용을 억눌러 놓았다. 단편인데, 단편이긴 한데, 단편이라고 쉽게 규정짓기에는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게 강제하는 글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마지막 글, ‘그것은 아니다’는 수차례 되돌아가서 읽어야 할 정도. 압축률이 굉장하다.

그런 점에서 해설이 도움을 주었다. 뭉개 뭉개 응어리진 의문을 간지럽혀줬다는 점에서.

내용들은 서술했듯, 남성적이고 어두운 분위기가 많다. 여성이 쓴 남성적 글 속에 남성적 판타지가 그대로 실려있다면 너무 순응적일테니까, 필연적으로 이런 글들이 나오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글들의 내용을 읊는 것은 이번 독후감에서는 그만두고 싶다. 상처의 나열이 될 뿐일 것 같아서 슬퍼지기 때문일까. 해설에서는 ‘『처녀치마』의 단편들은 성공하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니라 몰락을 견디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라고 이야기하며 그 상처들의 아묾을 믿어준다.

마음에 들었던 글이나 하나씩 옮겨봐야겠다.

처녀치마

차량이 흔들릴수록 그들은 더욱 밀착하고 있었다. 흔들리면 모든 것은 멀어지는 법인데, 그와 나도 그렇게 멀어졌는데, 팽팽히 깨어 흔들릴 때마다 파고드는 저 미세한 접근.

트라우마

쥐었을 땐 저… 참된 세상을 부르는 沈이었고, 폈을 땐 우―토피아를 외치는 큰金이었다.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12월 31일

“그런데 그런 우렁찬 소리를 내는 그 여자 말야, 정작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여. 무심히 지나다니다 어느 날 문득 발견한 건데 그 여자 정말 뻥튀기 한 알 들어 올릴 기운도 없어 보여. 그런 여자가 뻥튀기 기계를 눌러 뻥튀기를 튀기다니, 이게 이게 말이 안 되는 세상인 거야.”

두리번거리다

불안의 무게가 안정감을 드높이는 이치가 천칭과 흡사한 그것은, 균형 강박의 변종인 대칭 강박이라고 했다.

수업 시대

나는 진단카드에 표시되었던 플러스 표시를 떠올렸다. 표시선은 핏금처럼 붉었다. 생명을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기록하는 불경스러움이라니 직선이란 인색한 것들이다. 십자가마저도 나는 사랑할 수 없다. 오, 너희들은 비로소 모두 플러스가 되었노라는 그 건조한 구원의 메시지도.

불멸

한 개의 꼬막에 1분가량의 시간을 투여한 셈이었다. 그런데 4그램의 꼬막 살 하나를 씹어 삼키는 데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나쁜음자리표

T는 벌떡 일어나 다가오더니 내가 앉은 바퀴의자를 빙 돌려 진열장 끝으로 밀었다. 그리고 가위를 푸른 모니터에 푹 꽂아 넣고 세상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매운탕 냄비를 들고 내 지하 책방으로 걸어 들어오던 그 걸음이었지만 방향이 달랐다.

그것은 아니다

표시판에는 환불은 안 되고 통화만 가능한 잔돈의 액수가 점선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감정도 저런 게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미 통화는 끝났는데 깨끗이 환수 안 되고 늪처럼 고여 어디론가 흘러가기만을 기다리는 잔돈 같은 게.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