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든 영화든 내가 접하기 이전에 접하는 정보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에게 선입견을 주입해버린다. 올바른 해석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는 옳은 방향으로 향하는 지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영화든 글이든 그런 게 없다는 것이 너무 자명하니 내가 개척할 수 있었던 어떤 길을 놓친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아쉬워질 따름이다. 이번 글은 약간 그런 기분을 느꼈다. 아, 내 자의로 이 길을 발견할 수도 있었을텐데. 하는 심정이랄까.

책을 읽기 전 내가 접한 정보란 뭐 별 건 아니고 겨울서점에서 한 권여선님의 인터뷰다. 스포가 있었다거나 결정적인 무언가를 강요스럽게 우겨넣는 그런 건 아니었지만 노란색에 대한 집요함이라던가 하는 걸 설명해 주었다. 사실 그런 지점이 나에게 스포로 동작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용은 고3인 해언이 당한 살인에 대한 한만우에게의 취조로부터 시작된다. 사실이 아닌, 해언의 동생 다언이 자의적으로 상상하여 구성한 장면들인데 경찰의 강압적이고 단언적인 수사와 어눌해서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하는 한만우가 시작부터 시선을 확 빼앗아간다. 무슨 일일까, 왜 죽은거야 궁금증으로 시작하는 소설의 도입부는 그야말로 정석적인 글의 도입부가 아닐까 싶을 정도. 빨려들어가선 벗어나질 못한 내가 그 증명일테다.

소설은 다언, 상희, 태림의 시점으로 시시각각 진행된다. 여선님의 말로는 피해자, 중립, 가해자의 시선이라고 하는데 피해자도 가해자도 간접적이라는 점이 죽음에 당한 그들의 입장을 넌지시 제시하는 것처럼 재미있다. 마치 소설이 은유의 집합체인 것처럼 그들도 그런 집합의 형태를 한다.

레몬, 레몬과자, 노란 원피스, 노른자, 참외 같은 것들이 세월호의 메타포로 동작하며 레몬이 리본과 자매같은 것, 발음이 비슷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피해자의 아픔에 공감하는 것의 어려움과 가해자와 닿아있는 자들이 속죄하려면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까, 신에게 기대서만이 용서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절망감을 가져줬으면 하는 절망. 시로 쓰여진 세상을 믿지만 시를 쓰진 못하는 그녀들의 현실 같은 것들이 가슴을 아린다.

나는 정말 평탄하고 사랑받는 삶을 살아온 것처럼 보인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고통에 접근하는 방식은 서툴기 그지없다. 접근법을 고심한다는 것부터가 나와 상대 모두를 아우르는 고통으로 동작한다. 그래서 가끔 슬프다. 슬프지 못한 삶이 슬프다니 아이러니하기 그지없다.

책은 생각보다 짧았고 생각보다 술술 읽혔다. 고통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칠까. 할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리며 책을 덮었다.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