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아니 문학이란 무엇인가. 한때 나는 창작자와 소비자의 간극이란 환상에 불과하다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게임을 만들고 있는 것이고. 어릴 때의 이야기였다. 사실 겪어보지 않는다면 모르는 일이다. 이성복 시인이 무지라는 것조차 모르는 ‘무지’라고 말했던 것처럼 나도 무지라는 걸 모르는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 그럼. 문학이란? 문학이란 대체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하는 것일까.

이성복 시인의 시론집, ‘극지의 시’는 끊임없이 시를 저자를 화자를 독자를 성찰하는 책이었다. 대학교에서 강의한 것들을 모아둔 듯한 내용이었다. 시인으로서 어떤 스탠스로 시를 대해왔고 어떤 사고로 시를 적어 왔는지에 대해 굉장히 문학적, 은유적으로, 하지만 해설도 곁들이며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그가 이번 책에서 가장 중요시 여긴다는 문장이 있었는데, 바로 이것이다.

안나푸르나 등반에서 조난당한 젊은 대원의 일기를 보았어요……. “입이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남벽 아래서 긴 호흡 한 번 내쉬고, 우리는 없는 길을 가야 한다. 길은 오로지 우리 몸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밀고 나가야 한다. 어떤 행운도 어떤 요행도 없고, 위로도 아래로도 나 있지 않은 길을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그리고 그는 글을 쓴다는 것은 생이라는 깍아지른 절벽 앞에 마주 서는 것이라 말한다.

없는 길을 가야 한다. 하지만 없다는 것조차도 있다는 사실에 대응함으로써 존재하기에, 없다는 것은 사실 있다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부분도 책의 내용에 대응하여 풀이한 것이다.

그러나 이 ‘동일성’은 본래부터 동일한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동일하다고 말할 필요도 없잖아요. ‘차별성’이 전제되지 않은 ‘동일성’은 있을 수 없어요.

이성복님은 많은 것들을 ‘세 가지 요소’로 정리하기를 즐기는 것 같았다. 진선미에서 비롯되어, 책 내용에서 언급되는 많은 것들이 3에 대응하는데, ‘꽃에 이르는 길’에서 제아미의 1,2,3위 등급을 무경계, 차별성, 동일성으로 나누는 것이 그랬고, ‘세 가지 이야기’에서 각 이야기를 3차원 축으로 다루는 것이 그랬으며, 본인을 ‘진지함 측은함 장난기’ 세 가지 요소로 다루는 것에서 그랬다. 삼발이라거나, 뭐. 아무튼 3을 ‘안정’으로 환원시키며 끊임없이 환기시킨다. 그리고 저자, 화자, 독자가 각자의 위치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가 화자가 되었다가 독자가 화자가 되었다가 하는 것이 시적 감동의 원천이라고 한다거나, 과거 현재 미래를 있음-없음-있음…으로 다룰 것이 아니라 없음-있음-없음…의 구조로 다루어야 없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때 역시도 3이 어김없이 드러난다.

그리고 마지막, 대담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는 한 편 쓰나 천 편 쓰나 차이가 없어요. 한 편, 한 편에 천 편의 수준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한 편이 수준 미달이면 아무것도 안 쓴 거나 마찬가지예요.

하나의 글을, 작품을 대할 때도 전심전력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수학과 예술과 글을 한데 묶어 설명하고 있는 부분에서는 역시,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얼마 전에 이영도님의 판타지와 게임에 대한 글을 읽었는데 조금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있었다. 게임이 예술로 불릴 수 있을 것인가, 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혹시 모르니 링크를 남겨본다.#

동어반복이 많았던 것은 역시 수업을 정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 책도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아무튼 사상이란 길게 늘려봤자 사상으로 귀결되기 마련이다. 개인의 사상은 여러 은유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몇 단어로 정리할 수도 있는 것일테다.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