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보문호
중학교 2학년 봄 쯤이었다. 지금이야 내 고향 경주는 왕릉과 문화재와 엉성한 한옥들이 얼기설기 엮여서 좁은 상권 몇 군데를 형성하고 있을 뿐인 좁디 좁은 공간으로만 인식하고 있지만, 그 때의 우리에게는 광활하고 무궁무진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나잇대가 나잇대였던지라, 아직 세상을 완전히 체화하기에는 이른 시기였기도 했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이동수단인 자전거가 우리의 한계를 명확하게 정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자전거가 갈 수 있는 한계 지점이 우리의 세계의 끝인 셈이었다. 그래서일까, 보문호, 호수를 둘러싼 그 녹지 속 관광지는 우리 세계의 끝에 걸려있는 낙원지였다. 경주에 사는 아이라면 은연중에 어릴 때부터 특별한 날에만 보문에 가는 사실을 몸 속 어딘가에 단단히 박아두었기에 그 낙원이라는 수식어는 그 외의 것을 찾기 힘들 정도로 딱 맞아 떨어졌다.
그 날의 봄 날씨가 우리 몸 바깥을 간질간질, 간질여오고 바람이 코 밑을 살짝 훑었을테고 그에 그런 사사롭지 않은 봄날을 특별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가지 않으면 배기지 못할 그런 날씨였다. 그래서 나선 것은 확실한데 기억에 그라데이션 처리라도 했는지, 보문으로 가자고 결정하는 상황은 막연한 이미지로만 남아있다. 귀신이라도 나올 듯한 낮고 녹슬고 검은 빛이 전체적인 이미지를 대변하는 아무도 살지 않는 으스스한 폐가. 주변에는 들풀들이 우리 허리까지 올 정도로 자라나서 접근 금지령이라도 내린 것처럼 느껴지던 그 장소와 저걸로 될까 싶은 낮은 담벼락 하나만으로 갈라서 있는 그에 못지 않은 오래된 집, 그 집에서 별채에 해당하는 건물이 바로 이혁이 집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곳이었기 때문에 놀꺼리가 가득했던 곳이었는데, 그래서 그 날도 이혁이네에 가서 하릴없이 뒹굴거리다가 이내 지겨워 마당으로 나가 성훈이와 이혁이가 서로 테니스 라켓이라도 휘두르면서 봄바람과 닮은 기류를 만들고, 내가 그걸 구경하고 있던가 하는 그런 평범한 주말 낮이었을 것이다. 도저히 그런 평범하고 특별할 것이 없는 하루를 온전히 끝까지 끌고 가지 못하겠다, 이런 날에는 특별한 어딘가로 가야 할 것 같다 하는 결심이 나오지 않았다면 이상했을 그런 주말 낮이 아니었을까 막연히 상상해 볼 뿐이다. 형광색 테니스공을 이리 주웠다 저리 주웠다 분주했던 그 평범한 주말이 지금에 와서는 왜 이렇게 지극히 비현실적인 것인지.
햇살이 쨍쨍한 오후부터 우리는 분주하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벚꽃잎을 품은 봄바람을 제치고 달려나가는 건 꽤 신나는 일이었다. 제칠 것은 봄바람 뿐만이 아니라 조금 늦은 벚꽃 구경을 나온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들, 재잘거리는 참새 소리, 엊그제 온 비가 남기고 간 습기찬 웅덩이 등으로 차고 넘쳤기 때문에 우리 허벅지에 실리는 힘도 따라 넘쳤다. 이혁이의 노란색 자전거, 성훈이의 파란색 자전거, 내 은색 자전거가 도로 상황에 따라 파도처럼 일렁거리며 대가리를 내밀었다가, 횡단보도를 건너는 유치원생들처럼 일렬 종대로 섰다가 반복했다. 신호등을 기다리던 중, 이혁이의 목에 걸려 있던 디지털 카메라 위로 벚꽃잎이 슬쩍 올라섰다가 이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건전지로 동작하는데다가 건전지가 떨어지면 메모리가 날아가 버리는 네모지고 파란 싸구려 디지털 카메라였다. 아마 거기에 담은 그 수많은 사진들이 휘발되지 않고 아직까지 남아있다면, 그랬다면 그 현실적인 비현실은 지금까지도 비단 현실로만 존재했을지도 모르겠다.
보문 초입 부근에 도로가에 엉성하게 놓여있는 자전거 거치대에 다달아 페달 밟기를 멈춘 후에야 우리가 바람을 제친 것이 아니라 바람이 우리 뒤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벅지에서 정수리까지 화끈하게 오른 열기 때문에 따뜻했던 우리를 은근히 밀치고 지나가는 봄바람이 시원했다. 앞으로 계속해서 도로를 타고 나아가지 않고 초입 부근에 자전거를 멈춰 세운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관성일 뿐이었다. 아니, 지금까진 관성적인 이유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그때의 우리 체력이 딱 거기까지로 맞춰져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딱 거기까지라고 우리 내부에서 한계를 규정지었던 것일지도. 아무튼 보통이라면 그 자전거 거치대에 기름때 냄새 나는 손짓으로 자전거 체인을 걸었을 테지만, 그 날은 그러지 않았다. 사람들이 가을날 벼이삭 아래로 떨어진 낱알들처럼 초원을 가득 메우고 있을 것이 뻔한데도 어디서 난 용기였던건지, 자전거들을 끌고 거기까지 들어갔다. 도로와 그 호수 부근 초원 사이로 난 작은 오르막길을 낑낑거리며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벚꽃나무 안쪽으로 시원하게 자라 있는 초록색 나무무리 밑의 그 그늘이 선하다. 그 선선한 녹지. 현재 보문단지와는 사뭇 다른데, 지금은 사람들의 편의라는 명목으로 그때는 없던 붉은 빛 우레탄이라던가, 조각이라던가가 녹지 위를 가득 메워 버렸지만, 그 시기에는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있던 것이 분명한 깔끔한 잔디들이 막 미용실이라도 갔다 온 듯 깔끔하게 단장하고 있을 뿐이었다. 추억이 미화시킬 수 있는 것은 편리함이 아니라 불편함일 것이다. 그 때의, 사람 발로만 생겨난 흙길 외엔 인위적인 냄새라곤 없는 그 불편한 초원이 머리를 콩 쥐어 박기라도 한 듯 쨍하게 선명하기 그지 없으니.
그 시기의 우리는 몸싸움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몇 주에 한번은 아마 치고 박고 했던 것 같은데, 정확하게 몇 번이나 서로의 몸에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쨌거나 그때 우리 사이의 몸싸움은 분노와 같은 감정은 완전히 배제한, 놀이에 한없이 가까운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축구나 농구 따위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서로의 몸을 두드리는 것에서 스포츠 정신을 체득하곤 했다. 우리만의 페어 플레이가 정립되어 있었고, 그 테두리를 넘지 않는 선에서 우리는 서로를 두드리곤 했다. 보문호에 다달았던 그 날에도 어김없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 그 페어한 육체 스포츠, 몸싸움을 했다. 어제의 습기가 달무리처럼 풀잎을 감싸고 있어서 양말이 촉촉해지는 와중에도 몸을 던지며, 마치 고양이털이 뭉쳐지는 모양으로 뒤섞여 구석으로 굴러갔다. 사람들이 왁자하게 놀고 있는 그 중심부에서 그 은밀하고 어리기 짝이 없는 행동을 선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시대에 컴퓨터 게임이 성장기를 침범하지 않은 학생이 있었을까. 나야 그 컴퓨터 게임이라는 문화가 몰려와 완전히 정복을 끝내버린 고지나 다름 없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니 차치하고서라도 이혁이와 성훈이도 그 문화의 여파를 피하지 못했었다. 따지고 보면 학교 마치면 습관처럼 PC방을 전전하던 이혁이가 컴퓨터 게임의 영향을 가장 절실하게 받은 아이였다. 고등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와 같은 꿈을 바라보고 있던 성훈이도 말할 것은 없을 것이고. 그 때문에 우리의 상상력은 컴퓨터 게임의 프레임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그 상상력의 제한 덕분일까, 우리는 현실에서도 비슷한 상상력의 공간 속을 공유하며 누빌 수 있었는데, 그 공간은 일본 RPG의 테이스트가 가득했다. 우리는 초원 구석에서 몇몇 나뭇가지를 주우며 필드에 잔뜩 깔려있는 보물 상자라도 연 듯 입으로 효과음까지 내며 즐거워했다. 곧 우리 중 가장 리더십 있고 모험심이 강했던 성훈이가 가장 먼저 끌고 온 자전거 위에 오르며 말이라도 탄 양 행세하기 시작했고, 우리도 이내 곧 성훈이의 움직임을 따랐다. 풀잎을 파헤치며 자전거 바퀴가 돌아갔고, 진흙들이 딸려 올라와 여기저기 튀었다. 죽었지만 촉촉한 굵은 나뭇가지들은 우리의 칼과 방패가 되어 봄공기를 가로질렀다. 간간히 나뭇가지에서 갈라져 나온 나무 거스러미에 찔려 긁힌 상처를 입어가면서도 웃었는데. 그 때 찔린 그 상처는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결국 그 날은 보문 초입에서만 한참을 놀았고 다른 장소는 가지도 못했다. 기진맥진해질 때까지 기병, 보병, 창병 따위가 되어가면서. 지금으로 따지면 찰나에 불과할 그 시간이 그때는 왜인지 영원처럼 느껴졌다. 그 영원의 끝은 호수 끝에 걸린 주홍빛 노을이었는데, 그때 당시에 봐도 그다지 맑다고 하기 힘든 보문호 위의 태양은 그 시절 성훈이네 주방에서 성훈이와 합심해서 이혁이의 어린 면을 한참이나 지적하고서야 다 됐으니까 얼른 먹으라고 소리치던 그 때, 그 라면, 그 위에 동동 떠 있던 반숙 노른자를 닮아 있었다.
몸을 움직여서 기진맥진한 우리는 입맛을 다시면서 보문호를 나섰는데, 보문에서 시내를 채 나서기도 전에 이미 하늘은 천천히 내리는 진한 남색 블라인드처럼 낮게 깔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나 소중하게 휘둘렀던 그 전설의 검과 창 같은 것들은 어떻게 처리하고 나섰는지, 아무리 떠올려봐도 통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래서 아무래도 시무룩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