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여러모로 컨디션이 별로였다. 주말간 오랜만에 달린 게임의 여파가 아직 가시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 평일과 주말간의 경계에서 요동치는 파도가 오늘따라 심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튼 여러모로 안 좋았기 때문에 회사를 쉬고 너를 만났다. 태양이 그야말로 작열했고 날씨는 이제 꽤 여름에 다가섰다. 너는 그 날카로운 직사광선에 더해 학교를 마치고 왔던 터라 주말간의 여독을 채 풀지 못해 축 쳐진 몸이었고 그래서 마음이 안 좋았다. 물이 바짝 바른 마른 수성동 계곡 못지 않았다. 모기같이 앵앵거리는 중학생들에게 쫓겼기 때문이겠거니 넘겨 짚어 보았으나, 너는 자기반 아이들은 얌전하기 때문에 힘들지 않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월요일의 서촌은 조용할 것이라는 나의 선입견과는 다르게 그래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나름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 그리고 너와 이 공간 사이에 알게 모르게 박탈감을 심었다. 아, 너에게 박탈감을 심었다는 것은 온전히 나의 예측일 뿐이지만.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껴주길 바라는 어떤 바램일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 고즈넉한 한옥과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능소화와 우리집 컴퓨터 밑으로 정리하려고 노력했으나, 역시나 정리가 되지 않고 마구 펼쳐져 있는 선처럼 불규칙적이지만 어떻게 보면 큰 줄기는 규칙적인 골목 골목들. 그리고 그 사이 사이마다 오늘 네 원피스의 팝콘 무늬처럼 간헐적으로 박혀 있는 카페, 음식점, 스튜디오 따위들은 오늘만 우리 내부에 있는 것 같아서, 우리 평소 월요일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신기했다. 그래서 조금 슬펐다. 우리가 어느 한옥 게스트 하우스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와중 이 건물 저 건물을 둘러보고 있는 어느 커플들을 보며, 그들의 삶을 은근히 상상해 보면서 너와 안주하는 미래에 대한 농담을 나누었다.

그래도 밤은 선선했다. 우리는 헤어지기 아쉬워 경복궁역 앞의 작은 카페에 들어가서 나는 핸드 드립, 너는 크림이 올라간 플랫화이트를 시켰다. 커피는 무난했는데, 주문한 것과 다르게 너의 플랫화이트 베이스의 아인슈패너의 크림은 양이 작았고, 그래서 조금 불만스러웠다. 너는 별로 티를 내지 않았다. 일자로 된 나무 테이블에 의자가 두개 놓인 자리를 너는 귀엽다고 했고, 나는 우리와 딱 맞다고 느꼈는데, 과연 앉으니 마치 카페 안에서 우리가 앉은 그 공간만 이름없는 외딴 섬처럼 느껴졌다. 드립 커피와 아인슈패너가 통통배를 타고 흘러 흘러와서 테이블에 안착하는 것 같았다. 무역처럼 외국의 그 신비한 문물과 우리의 월요일 저녁을 맞바꾸었다.

그 카페, 그 공간에서 너는 나에게 일본책을 많이 읽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도토리’라는 일본 물리학자가 쓴 에세이를 읽고 있었다. 조금 억울했다. 요 최근에는 바로 이전에 읽은 ‘리뷰 쓰는 법’에 이어 겨우 두 번째 읽는 일본 서적인데. 그래도 마음 한켠으로는 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찔끔한 감은 있었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어순이라던가 언어의 특징같은 것이 유사점이 많으니 번역이 수월하기 때문이 아닐까, 필연적으로 딱딱해지는 타 외국 서적들은 자연스럽게 문어체를 구사하는 번역이 쉽지 않을 것 같다, 등의 생각들을 하던 참이었다. 이어서 너는 소설에 대한 글귀를 보여주었는데, 이런 글이었다.

우리는 더 많은 소설을 읽으며 더 많은 타인이 되어야 한다.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함부로 말하지 않기 위해, 세상은 무수히 많은 주인공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위해. -하현, 이것이 나의 다정입니다.

이 글과 너의 말들이 복합적으로 이어져서 체인처럼 맞물리더니 내 머릿속에 있는 자전거 바퀴를 굴렸다.

어릴때 나는 일본 문학에 빠져 있었다. 그 시발점이 되는 작품은 바로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 단편이 세 가지 수록되어 있는데, 첫째와 둘째 작품이 같은 주인공들을 다루고 있고 세 번째 작품이 별개의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 셋 모두에 죽음이 등장하는데 첫째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의 할머니, 둘째 이야기에서는 남자 주인공의 아빠였던 엄마, 셋째 이야기에서는 나의 애인과 애인의 남동생의 애인. 어디에선가 단편은 짧은 내용 안에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하기 때문에 죽음을 많이 활용하곤 한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과연 이 책도 그렇다. 이 책이 제시하는 완전한 상실은 남아있는 사람의 삶을 통과하여 제삼자인 독자들의 마음에도 천공기를 들이대는 무뢰한이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는 세번째 이야기인데, 좀 묘한 이야기다. 특별한 날 특별한 장소에서 잠깐이나마 죽은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골자의 내용을 주인공과 신비로운 여자와 죽은 여자친구의 교복을 입는 남자친구의 동생을 통해 풀어간다. 그 중 마지막, 주인공이 죽은 남자친구와 조우하는, 혹은 조우하는 환상을 보는 장면이 우리가 앉아있는 섬 위로 슬그머니 떠오른 것이다. 주인공이 남자친구를 잃어버리고 그 상실에 주저앉는 모습이 네 눈동자 속의 나와 슬그머니 오버랩 된다. 나는 늘 상실을 달고 살아왔구나, 그 순간 생각했다.

너도 오늘 나에게 상실에 대한 편린을 말해주었다. 너는 어린 시절을 잃어버렸다고 했다. 나는 너에게 어설픈 위로랍시고 나의 고통을 언뜻 꺼내었으나, 그 어설픔은 나의 교만일 뿐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왔다. 나는 미안했다. 그래서 차마 말하지 못했다. 과거의 내가 그토록 바라던 오늘이, 오늘 내가 그토록 바라는 미래가 결국의 결국에는 상실로 이어질 것이라는, 그 세번째 단편의 주인공도 결국 현재, 남자친구를 상실했다는 사실 자체를 상실해 버릴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래도 주인공이 그 한순간 환상처럼 죽은 남자친구를 만난 것처럼 나도 과거의 내가 바라던 오늘을 너를 통해 조우하고 있었다는 것을. 난 그렇게 내가 잃어버린 것도, 내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는 법도 깨달았다. 하지만 여전히 미안했기 때문에, 그리고 쑥쓰러웠기 때문에 끝내 너에게 말할 수 없었다.

네가 버스를 타고 돌아가는 것을 본 후, 지하철로 내려가는 길에 생각했다. 오늘도 잃어버렸네. 주말에 다시 되찾아야지, 하고. 1799일이 거의 다 지나간 밤공기를 뒤로 하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