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도토리
충동적으로 책을 구매하곤 한다. 어떻게 보면 취미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는 무언의 필연성을 느껴서 구매한다. 오늘 그래도 뭐라도 사야 하는데, 이대로 빈 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데, 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고나 할까. 이 책도 거의 그런 느낌으로 책과 책 사이를 걸어다니다가 발견한 책이다. 책을 고를 때 가장 먼저 보게 되는 것은 겉면, 표지이게 마련인데 이 책은 원색의 파란색과 그 외의 밝은 색들이 감각적으로 배열되어 있어서 일단 시선을 사로잡았다. 표지로만 책을 구매해야 한다면 이 책은 반드시 살 것 같은 그런 감각이 깃들어 있는 표지였다. 당연히 책은 디자인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실을 따져봐야 했다. 보통은 책 뒷면에 적힌 요약글을 통해 책의 내용을 가늠하고 그것으로 결정나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에도 그렇게 결정나 버렸다.
정밀한 과학 정신과 섬세한 예술 감각을 절묘하게 융합한 수필 문학의 신경지</br> 인생의 신비와 자연의 섭리를 응시하는 물리학자의 내면생활
과학 정신과 예술 감각의 융합이라니. 쉽게 유혹을 떨칠 수 없는 문구였다. 결국 그래서 이렇게 구매하고 이렇게 완독했다.
데라다 도라히코라는 물리학자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우리 나라 물리학자를 대보라고 해도 전혀 대지 못하는데 일본의 물리학자라니. 알리가 없었지만. 일단 물리학자라고 하면 에세이와는 전혀 무관할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작용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 선입견을 부숴뜨리는 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 나쓰메 소세키의 제자라니. 이 선입견을 내세우자니 저 선입견이 방해하는 형국이랄까. 결국 어떤 선입견도 제대로 나설 수 없었다. 읽어봐야 알겠구나,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원래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내용의 무거운 에세이를 쓰는 사람이라고 옮긴이의 글은 말한다. 그의 논리적인 일면은 ‘흡연 사십 년’이라는 에세이에서도 드러난다.
흡연가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연기 만드는 기계와 같다. 하루에 지궐련 스무 개피씩 사십 년을 피웠다고 치면 합계가 29만 2000개비, 대략 30만 개비다. 한 개비의 길이를 8.5센티미터로 치고, 그 양의 아사히를 세로로 이으면 2만 4820미터, 대략 6리를 조금 넘는 정도다. 연기의 용적으로 따지면 어느 정도일까. 가령 궐련 1센티미터로 1리터의 짙은 연기를 만든다고 하자. 그리고 한 개비당 3센티미터만큼의 연기를 만들어 낸다고 하면, 30만 개니까 90만 리터, 대략 한 변이 10미터인 육면체 부피만큼의 양이다. 연기 만드는 기계로서 인간의 능력은 그다지 자랑할 만한 게 아닌 듯하다.
일반적인 공학도의 사고능력을 테스트할 때 사용하는 질문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의 사고가 공학적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진정한 공학도라면 이런 논리적인 유희를 즐기는 게 당연하겠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게 참 어렵다. 누군가가 논리를 풀어 놓으면 아, 그런가? 하고 검증도 하기 귀찮아 한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나의 약점. 고쳐야 할 부분이다. 이렇게 자괴감도 느끼게 만든다.
그의 글 곳곳에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묻어 있는데, 많은 주제가 과거를 향하고 있다. 과거를 조망하면서 복고를 바라는 그 어떤 시각이 잔뜩 물들어 있는데, 나의 감각과 흡사해서 무척 재미있다. 에세이란 아무래도 과거의 것에서 소재를 가져오게 마련이니까 향수와 결을 같이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책의 제목이기도 한 도토리는 죽은 아내와 딸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감정이 손에 잡힐 듯하여 마음이 안타까웠다.
나는 그 허물없는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먼저 간 아내의 단점과 장점, 도토리를 좋아하는 것도 종이학을 잘 접는 것도 전부 물려받아도 상관없지만 처음과 끝이 비참했던 제 어미의 운명만큼은 절대 이 아이에게 되풀이시키고 싶지 않다고, 그렇게 절실히 생각했다.
이런 직설적인 문장으로도 마음이 움직인다.
당연히 그가 나쓰메 소세키에 대해 쓴 글도 재미있다. 무엇이든 진지하게 관찰하고 그것을 기록하면 글쓴이의 시각이 절절히 느껴져 즐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난 아직 그의 스승의 역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지 못했다. 다음번에 기회가 된다면 한번 읽어봐야 겠다는 생각을 남기게 된다. 그 소설에서 엉뚱한 물리학자로 나오는 등장인물이 데라다 도라히코를 모델로 하고 있다고 하는데,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물리와 문학의 접점을 많이 기대했는데 이 물리학자의 감정선을 소개하는 것에 온 힘을 쏟은 책처럼 느껴진다. 아무래도 물리라는 단어는 무겁고 어렵게 느껴지니까. 옮긴이 역시 이 물리학자의 쉬운 글들만 모아왔다고 언급하고 있으니 불평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좀 아깝게 느껴지긴 한다.
글이 촘촘하고 번역투가 조금 거슬려 천천히 차근차근 읽어야 하는 책이었다. 하지만 그의 감정선이 무척이나 공감이 되었고, 어떻게 보면 나의 롤모델로 삼아도 무리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마음이 충만해졌다. 다른 책도 읽어볼 기회가 있다면 좋으련만. 일본에서는 데라다 도라히코의 책이 전집으로 팔릴 정도로 인기가 있다고 하니 일본어를 잘 한다면 좋았을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아 맞아. 그의 글에서 청일전쟁이 나오는데 그 참사가 일어나는 와중에도 그의 수필은 담담하기 그지 없다. 일본 자국 내에서는 멀리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조금 분노가 일었지만, 과연 내가 이 물리학자의 입장이었더라도 우리 나라에 측은지심을 느꼈을까, 되돌아보게 되기도 했다.
아무튼, 즐겁고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