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 Paws Essay] 번아웃인가?
오랜만에 키보드에 손을 얹는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방금 내린 커피를 한모금 머금는다. 휴, 정신을 차리고 모니터를 응시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집중력의 문제? 아니면 주변이 어수선해서 그런가? 아, 싸구려 의자라서 쿠션감이나 허리를 잡아주는 감이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뭐,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핑계거리를 낚아 올려 보았지만, 모니터로 다시 시선을 가져가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줄어들진 않았다.
모니터로 어떻게든 시선을 모으려고 한참을 노력하고 있는 지금, 사실은 이렇게 모니터 앞에 자리하기까지도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두 달 남짓. 시간은 내가 TV 앞에서 게임 패드를 붙들고 씨름을 하든, 책과 코드와 모니터와 레슬링 한판을 하든 전혀 신경쓰지 않고 추월차선이라도 탔는지 빠르게 나를 통과해 나갔다.
어느 순간 ..번아웃인가? 의문이 들었다.
번아웃이라는 단어에 갑자기 생각난 한 가지 사실. 예전에는 슬럼프라는 단어를 더 많이 썼던 것 같은데 어느새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말에 완전히 잠식 당했다. 이제는 슬럼프라는 단어가 입에 착착 감기질 않는다. 마치 열심히 불타던 나의 일상이, 그 붉은 것이 소화기 분말이라도 얻어 맞았는지 어느새 하얗게 질려있는 것처럼 내 의식의 뒷편에서 조용히 벌어진 일이다.
제목이 번아웃인가? 하는 의문형인 이유는 나의 이 상황을 ‘번아웃’이라고 정확하게 규정짓기가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것이 사실 내 일상은 원래 하던 것에서 조금 축소되었을 뿐이다. 아예 수습할 수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무너져서 무기력하게 나가 떨어진 게 아니라 기존에 하던 개인 코딩, 헬스, 다이어리 따위의 큰 줄기는 마치 들숨 날숨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듯 묵묵히 했기 때문에. 그 외에 그냥 잔가지라고 볼 수 있는 것들, 예를 들자면 자투리 시간에 독서하기, Vue.js 공부하기, 주말에 시간 내서 자기계발하기 같은 것들. 정형화되지 않은 것,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쉬는 시간을 ‘할애한다’고 생각하면서 했던 것들. 그런 것들이 어느새 경제 논리에 의거해서만 움직이는 줄 알았던, 정원 가위를 들고 난입한 보이지 않는 손에 난도질 당한 모양이다.
어느 순간 깨닫고 보니 나는 그냥 기계처럼 늘 하던 것들을 습관처럼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주말에 쉴새 없이 게임을 돌렸는데 그게 깊은 무의식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건드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게임을 한번 잡은 나는 적정선에 그걸 놓기도 힘들어할 뿐더러 게임 시간이 늘어질수록 묘하게 무기력해지는 패턴이 있다. 게임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나의 습관의 문제. 예전부터 킬링 타임으로만 게임을 소비해 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건가. 그래도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뭐 말할 것도 없이 리서치를 위해서다, 나는 게임을 좋아해서 개발하는 건데 왜 게임을 못하고 있는 거지? 같은 핑계같은 이유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 이유에 침잠된 나머지 그런 탓도 있겠지. 덕분에 언젠가는 꼭 해야지 하고 벼르고 있던 크로노 트리거도 엔딩을 볼 수 있었고, 진한 여운을 부스터 삼아서 일에 집중할 수 있었으니 순기능이 없진 않았다고 생각한다.
크로노 트리거 엔딩
미묘하게 비틀린 상태였기 때문에 오래 갔나보다. 완전히 비틀린 거라면 잘못됐구나, 쉽게 인지할 수 있었을텐데, 비틀렸는지 아닌지 객관적으로 보기가 힘든 상태니까 그냥 관성적으로 하루, 또 하루, 그렇게 하루들이 쌓여서 어느새 두달 남짓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얼마 전부터 이 미묘한 상태를 인지하고는, 어떻게든 원상태로 다시 비틀어 보고자 다시 자투리 시간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친 손길은 무거운 책을 들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최대한 가볍고 또 가벼운, 깃털같은 책을 한참이나 찾아 헤멨다. 고르고 고른 후 내 손에 들려있던 책은 포프 TV. 유튜브에서 유명하신 바로 그 분의 책이었다. 사실 자기계발에 굉장히 치우쳐져 있는 내용임이 뻔했기 때문에, 보통 때라면 내가 가진 책 중에서 후순위에 들었을 터다. 하지만 몇달 굶은 사람의 눈에는 빠르게 데워먹을 수 있는 인스턴트가 한참 요리해서야 숟가락이라도 들 수 있는 9첩 반상보다 나은 것이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책이었지만, 꽤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의 반면교사로써 충분히 동작했다. 읽으면서 제법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은 구절은 아래와 같다.
정말 자기 실력을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는데, 부담스러우니 효율적이진 않지만 대충 하면서 '그래도 나는 인생에서 뭔가 하고 있고 미래를 위해서 뭔가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기만 하면서 자기합리화에 빠지는 것에 대한 우려도 있어요.
인생에서 뭔가 하고 있고 미래를 위해서 뭔가 하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기만 하는 사람. 마치 지금 내 모습을 도촬이라도 한 것처럼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그 순간 이치를 깨달은 현인처럼 뭔가가 나를 관통했고, 나는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결국에는 커피를 한입 가득 머금은 채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타이핑을 해나갈 힘을 얻었다.
줄이자면 길고 긴 자기합리화. 하지만 그 자기합리화를 정면으로 목도하기 위해서라도 이렇게 정리하는 글이 필요했다. 정리가 도움이 되지 않은 적은 없으니까. 정신이 흐릿할 때는 샤워라도 하면서 몸을 정리하고, 방 구석을 굴러다니는 먼지도 정리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도 정리가 되어있곤 했으니까.
마음이 흔들릴 때는, 뭔가를 정리하고 싶을 때는 또 다시 키보드에 손을 얹어야지. 물론 커피도 한잔 진하게 내려서.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