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파씨의 입문
누군가는 늘 누군가의 약자일거란 생각을 하니 조금 서글펐다. 책은 내가 밤을 걷게 만들었고, 죽게, 낙하하게, 옹기가 되게, 고양이가 되게, 양산을 팔게, 우산을 쓰게, 뼈를 훔치게, 냉장고를 옮기게 만들었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내가 집에서 불을 끄거나 살아가며 잊거나 빗방울 맞지 않는 물체가 되거나 노인을 인상 찌푸리며 보거나 청사 내부에서 업무를 보거나 점장이 되거나 죽은 동생의 집을 되찾거나 개 주인이 되거나 하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나 자신이 관여되면 너무나 관대해지는 나. 내가 누군가에게 약자인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강자라는 사실을 애써 직면하고 싶어하지 않는 나. 비겁한 나. 삶이란 게 그런 것이라면 축생의 삶과 다른 게 뭐란 말인가.
오래도록 막혀있던 수채구멍을 시원하게 뚫은 것처럼, 몇 달이나 내 침대 머릿맡에 고요하다면 고요하게 놓여 있던 이 책을 하루만에 다 읽었다. 간만에 시동을 건 오토바이처럼 내 독서뇌(그런 게 있다면)도 콜록 콜록 매연을 몇 번 내뿜고는 부르릉, 활자 사이를 활보했다. 엔진도 가끔은 시동을 걸어줘야 된다던데, 너무 오랫동안 시동을 걸지 않았던 터라 마치 음주 운전이라도 하는 것처럼 비틀거리고, 쉼표에 치이고,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를 통과하는 톨게이트에서 머뭇거렸다. 그랬기 때문에 마침표 중에 마침표를 조우했을 때 마치 땅끝 마을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노동자와 사회 약자들에 포커스를 맞춘 글들이었다. 컨셉 중 몇몇개가 겹치는 것이 있었는데 그런 부분들도 한 작가의 구성체 중 하나라고 생각하니 재미있었다. 예컨대 이런 글들. 직업상 폴리곤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이라서 더 인상 깊다.
세 개의 점이 하나의 직선 위에 있지 않고 면을 이루는 평면은 하나 존재하고 유일하다.
나의 무관심함에 사무치게 소름 돋을 수 있었던 것도 글의 마력 중 하나가 작용한 이유일까. 개발할 때도 마찬가지. 모든 것을 고려할 수는 없지만, 고려하는 척이라도 해야 후일 문제가 없고 안정적인 시스템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건데, 나는 시스템에 대한 이해도도 떨어지고 히스토리를 분석하는 능력도 떨어지는, 내가 사회 구조의 모듈 한 부분을 맡은 프로그래머라고 한다면 코더라고밖에 할 수 없겠다.
‘대니 드비토’, ‘낙하하다’ 같은 실험적인 글들이 재미있었다. 삶에 대한 적당한 은유가 직설적인 글들이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난 지금 은유하고 있는 중이야’하는 글들이 이해가 쉽다. 다른 글들은 무슨 의미지, 골머리를 싸매야 하는 상황이 자주 연출되었다. 은유가 직설적이라는 말, 생각해보니 여러모로 재미있는 문장이 아닌가?
간만에 드라이밍을 쭉 하고 난 ‘독서뇌’가 다시 콜록거리더니 잠잠하다. 앞으로 수많은 글들 사이를 활보해야 할텐데 벌써부터 골골거리면 골치가 아파. 엔진오일이라도 갈아야 하나.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