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해서 가끔 생각해본다. 내가 죽는다면, 부터 시작해서 엄마, 아빠, 여자친구, 우리나라, 지구까지. 참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바꾸면서 죽음을 상상한다. 재미있는 것은 미시적인 부분에서 거시적인 부분으로 점점 그 스케일이 커진다는 것. 그리고 그 미시적인 것의 중심에는 내가 있다는 것. 죽음이라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었다. ‘푸른색으로 우리가 쓸 수 있는 것’에서 ‘나’가 느꼈던 그 감정이다.

항암약물투여실 병상마다 앉거나 누워 있던 모든 암환자들의 고통이 그렇듯, 나의 고통 역시 개별적이고 구체적이었지만, 또한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세상에 널린, 흔하디 흔한 고통이었다.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세상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점점 상상을 넓혀간다는 게 반증하듯이 아직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란 끊임없이, 그리고 경계 없이 상상하는 것 외에는 그다지 효율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듯하다. 죽음이 그렇고 고통이 그렇고 삶이 그렇고 역사가 그런 것처럼.

김연수님의 글을 읽으면 역사와 고통과 연민과 나약함이 저미듯 스며드는 것 같다. 하지만 또한 항상 희망적이고 미래에 대한 믿음이 강인한 것처럼 느껴져서 좋다. 그 모든 것이 막 자고 일어나서 가물가물하게 남아있는 꿈의 내용처럼 몽환적이고 환상적이라는 지점도. 그에 비해 강점도 약점도 너무나 현실적이라는 부분에서 좋아한다.

사월의 미 칠월의 솔에 나오는 팸 이모를 보자면, 꿈을 잃어 좌절하면서도 늘 새로운 꿈의 형태를 찾아내서 손에 쥐고 마는 것처럼. 나는 이모의 꿈이 사르르 녹았다가 다시 단단하게 굳는 모습을 바라보았고, 그 일상적이지만 기묘한 장면에 취한 듯이 몽롱했다.

다시 죽음을 생각해본다. 인구가 나다 에 나온, 바이올린 연주가 인구보다 뛰어날 게 분명한 혜진이 인구에게 은수의 바이올린을 주고서 그 기계적인 연주를 들으며 죽음을 초연히 기다리는 모습을 생각해본다. 상상해본다. 어떤 장면을, 미래를 그리고 있었을지 혜진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거기 다른 환자들 사이에, 그들과 마찬가지로 푸른색 줄무늬 환자복을 입고,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라는, 하지만 아무런 감정 없이 다만 오선지 위의 선율을 바이올린 소리로 번역할 뿐인 그 기계적인 연주를 혜진은 듣고 있었다. 공포영화보다 더 괴기한 그 장면을 한참 들여다보던 은수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은수는 ‘공포영화보다 더 괴기한 장면’이라고 했다. 은수와 혜진은 공포 영화를 보는 것을 통해 서로의 교감을 나누었었는데, 그렇다면 그들은 그 동영상, 3차원을 넘어선 차원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공포 영화 보듯 교감했던 것일까. 바라볼 수 있었다면 자기 자신을 잊은 은수에게서 혜진 역시 공포 영화를 보는 것같은 기분을 느꼈겠지.

‘주쌩뚜디피니를 듣던 터널의 밤’을 통과하며 죽음이 삶과의 단절과는 거리가 멀다는 그의 의견에 대해 고민해 본다. 터널 속에서, 큰누나에게서, 나에게서 느껴지는 엄마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소설에 대해 생각해 본다. 타인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생각해 본다. 즐거웠나?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