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회사에서 티 나게 딴짓하기
계속해서 발길질을 하지 않으면 서서히 가라앉는다. 가라앉으면 안되지, 암. 근데 그 발길질이라는 게 영 귀찮은 행동이라는 게 문제다. 조용히 가라앉아서 물 바깥으로 비치는 아지랑이같은 빛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 여유로움이 싫지만은 않다는 점도 문제다. 왜 물 밖으로 굳이 고개를 내밀고 파닥거리면서 앞으로 전진해야 하는지, 그 당위성을 완전히 잃어버릴 만큼 물결은 잔잔하고 따뜻하고 포근하기까지 하다. 내 삶에 대한 이야기다.
일주일을 열심히 파닥거리면서 조금 전진하다가도 어떤 해초나 암초에 걸려 물 속으로 조금이라도 침몰한다 치면, 도저히, 도저히 자의로 쉽게 벗어날 수가 없다. 요새들어 더 심한 느낌인데, 폐까지 물이 차서 인어라도 되어버린 모양인지.
그래서 그 침체됨을 벗어나는 흉내라도 내려고 나름대로 해보는 일들이 많다. 새로운 걸 해본다. 패스. 지금 벌려놓은 일도 많은데 새로운 일을? 더군다나 새로운 일은 새로운 압박이 되어 떠오르긴 커녕 나를 더 침체시킨다. 일정을 더욱 빡빡하게 굴린다. 으, 그 방법도 압박에 굴복하고 말았지. 결국 가장 쉽고 가장 간단하게 도피할 수 있는 독서를 고른다. 조금 치사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뭔가를 얻고 있다고 나를 속이기 가장 쉬운 방법이니까.
이번에 읽은 책은 ‘회사에서 티나게 딴짓하기’. 개발자의, 그 중 디자이너의 에세이는 굉장히 인상적인 것들이 많다. 기술적인 것에 침잠되지 않고 그 크리에이티브한 면을 숨김 없이 보여주는 이유일까? 그리고 책도 참 이쁘고. 이전에 읽었던 ‘인터랙티브 디밸로퍼’라는 책도 이 책과 그 결이 비슷하다. 기술과 디자인의 접목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비슷하다. 나 자신은 프로그래밍에 더 비중을 두고 있는 개발자이지만, 개인 개발을 위해서는 디자인으로도 발을 살짝 담궈야 하는 입장에서 감정 이입이 쉽다는 장점이 있다.
저자, 원성준님은 정말 지독한 일중독자였다. 옛날, 맨 처음 이 책을 구매할 때 나는 멋대로 회사에서 티나게 딴짓한다는 걸 회사의 일에만 목메지 말고 나 자신의 것, 토이 프로젝트도 꾸준히 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었는데, 전혀 그런 게 아니었다. 아니 뭐 굳이 따지자면 비슷하긴 한데 한 차원 높은 의미였다. 자신의 작은 프로젝트를 회사의 메인스트림까지 끌어올려서 업무로 만들어버리라는 것이었다.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점도 놀랍지만(기업 문화 차이일까, 업계 차이일까.) 본래의 일과 본인의 일을 모두 쳐내는 저자의 몰입도와 추진력도 대단하다. 주말까지 반납하면서, 그것도 매주 그렇게 진행하려면 보통의 몰입으로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데. 얼마나 자신의 일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걸까. 하는 생각들이 이어진다. 나도 나름대로 열정은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와 비교하면 내 것은 냉정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자괴감까지 든다.
뭐, 그런 의미에서 마음에 불을 지피는 것은 충분했다. 그리고 몇몇 인사이트도 챙겼고. 쉬운 방법도 쉬운 방법 나름의 의미가 있는 셈이다. 인사이트는, 결국 인간관계 같은, 개발 외적인, 하지만 실제로는 중심에 있는 것들. 팀장님도 ‘적극성이 조금 부족한 것 같다’는 피드백을 주셨었는데 이 책을 읽고 그 의미를 더욱 깊게 통감할 수 있었다.
나는 담당자들의 디자인 결과물보다는 그들이 풀려고 했던 문제와 기회 영역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중에서 내 관심사와 맞아떨어지고, 또 내가 디자인을 재해석해 낼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모든 것이 자신이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 시킨 일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일을 자율적으로 한다는 마음으로 책상 앞에 앉는다면 과정과 결과물 모두 나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의 디자인을 계속 관철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지지를 얻어낼 것인가? 내가 찾은 가장 좋은 방법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그들이 오랜 세월 거쳐온 사고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며칠만에 간단히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또 다시 의지를 불태워보자.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