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쾌락독서
문유석 판사, 이전에 미스 함무라비를 너무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의 다른 글을 읽어야겠다고 다짐, 또 다짐하고 있던 차였다. 요새는 ebook을 사는 이유가 ‘할인하기 때문’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수가 없다. 리디북스, 매번 나의 돈을 차곡 차곡 빼앗아간다. 이번에는 비밀 썸딜 쿠폰이었나? 자주 접속하고 한달에 얼마 이상 구매한 독자들에게만 보내주는 쿠폰 이벤트를 시작해서 또 나의 주머니를 털어갔다. 아마 그 쿠폰이 생길 쯤에 구매한 책이다. 하도 책을 스스럼없이 구매해서 모르긴 몰라도 에세이라, 가볍게 읽을 수 있겠구만. 문유석 판사가 쓴 글이라고? 좋아. 믿어보지. 하면서 장바구니에 담았던 게 분명하다. 아무튼 이 책은 한동안 내 ebook 서재에 얌전히 잠들어 있었고, 무겁고 힘든 책을 읽고 난 후에는 늘 그렇듯이 가벼운 책으로 몸을 가볍게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나의 눈에 띄었다.
에세이는 쉽게 읽히지만 생각할 거리가 많다는 점에서 빨리 다 읽어치우고 나면 조금 죄책감이 든다. 하지만 이북 리더기로 책을 읽으면 독서 노트를 작성하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에(전자 잉크의 반응 속도는 내 개발 속도만큼 절망적이다.) 빨리 읽어치우고 책을 정리하면서 줄 그은 글들에 내 생각을 빨리 옮겨 적어야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기 때문에 여러모로 어찌 해야할지 모르겠다. 이런 선택의 기로에서 결국 간택되는 선택지는 더 편한 방법이고, 그래서 이번에도 난 빨대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입에 빨아먹듯이 독서해버리고 만다. 그래서 ‘생각에 관한 생각’ 독후감을 채 쓰기도 전에 다 읽어 버리고 만다.. 독후감 써야 한다는 마음의 짐이 두개나 생겨버리니 마음이 불편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이번주에는 꼭 다 써야지, 하고 이렇게 연속으로 줄줄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판사의 눈으로 보는 책, 즉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궁금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뛰어남과는 거리가 먼 아이였고, 지금도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범인인지라 깊은 생각과 지식의 속사정이 궁금했다. 하지만 이 책은 판사에 대한 책이 아니었다.(당연한가?) 문유석 판사 개인에 대한 책이었다. 남의 역사를 읽으며 그 위에 나를 투영하는 건 역시 재밌는 일이다. 아무튼 그 시절에 내가 하지 못했던 일, 생각들을 했던 그의 과거를 읽고 있자니 자괴감이 조금 드는 것은 어찌할 방도가 없는 일이다. 그는 자신이 뛰어나다고 생각했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투로 이야기를 주워담는데, 뛰어남의 기준도 지극히 개인적인 것인지라.. 아무튼 책에서 여러 모로 생각하게 된 문구를 몇 개 주워보자면 아래와 같다.
이들의 저녁은 두 종류였다. 아이와 씨름하거나 힘겹게 아이를 맡기고 야근을 하거나. 책을 선정할 때마다 쉬운 책이었으면 좋겠다, 다 읽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걱정들부터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번 책 수다를 떠는 한 시간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나와 남의 시간이 늘 같은 가치를 가지진 않는구나.
어떤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공부와 자료조사를 하여 뭔가 있어 보이는 소설을 쓰는 것은 성실성과 어느 정도의 지적 능력이 있다면 가능하다. 하지만 소재와 주변 지식에 함몰되지 않고 그걸 도구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느 정도의 지적 능력이라도 갖췄으면 좋겠다.
여학생은 순정만화 코너에, 남학생은 소년만화 코너에 일사불란하게 나뉘어 앉아 가끔 서로를 힐끔거리던 그때의 만홧가게가 떠오른다. 우리는 그곳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한다.
책 소개 만화(요새 유행하는 모양인데, 자주 보이는 바로 그 형식이다.)에서 바로 이 부분을 따왔다. 이 부분에 너무 격한 공감이 일어서 책을 샀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상하게, 그때 들은 음악은 잘 기억이 안 나고, 그 한낮의 분위기만 기억난다. 낡은 한옥집 마루. 무료한 일요일 한낮. 말없이 턴테이블만 쳐다보는 아저씨. 쏟아지는 햇살. 문밖 골목길에서 들려오는 잡상인들 소리. 그리고 이 모든 것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것도 같고, 어울리는 것도 같은 존과 폴의 목소리.
나도 이런 추억처럼 한 장면으로 떠오르는 컨텐츠를 만들고 싶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정의감이 아니다. 오류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이다.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의감이야말로 가장 냉혹한 범죄자일 수 있다
보수적인 판단, 다수가 믿는 판단이 정의는 아니다. 오류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남이 선택하지 않더라도 옳은 판단을 주워담을 수 있어야 한다. 판사도 참 힘든 직업이겠구나. 뭐든 안 그러랴.
등등 옮기고 싶은 글이 많은데, 지면 관계상(아무튼 줄 그은 모든 문구를 주워 섬길 순 없는 노릇이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자.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