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별 관계 없는 이야기를 우선 시작하기 전에 불평 한 가지를 늘어놓고 싶다. 뭐, 원래부터 책과 그다지 관계 없는 이야기들을 위주로 글을 구성해왔으니까 평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글이긴 하지만, 이 불평에 방.점.을 찍기 위해서 은근히 적어왔던 주변적인 이야기를(라고 표현하기 미안할 정도로 대다수의 이야기가 책과 관계 없었지만.) 이렇게 메인으로 끌어올린다. 그 불평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독서광이라면 의례히 그렇듯이 나도 원래는 실물 책만을 책으로 꼽던 사람이었다. 책넘김이라던가 책에서 나는 종이의 냄새라던가 하는 경험, 즉 익숙한 UX를 벗어나는 것이 굉장히 불편했기 때문에.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라던가 UX의 발전이라던가 그런 것들에 의해 전자책도 빠르게 내 일상 속으로 스며들어왔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먹듯이. 그래서 이제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편한 부분도 다수. 연필 없이도 책에 줄을 그을 수 있다니, 정말 이게 무슨 일이람. 근데 이렇게 되니 문제는 다른 곳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그 복병은, 함정은, 바로 바로, PDF! 망할 빌어먹을 PDF! EPUB에 익숙하지 않을때 PDF는 익숙함이라는 무기로 나를 살살 꼬셔왔더랬다. 근데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잖아. 이제 PDF는 책만큼 편안하지도, EPUB만큼 편리하지도 않다. 그 둘을 잇는 중간다리 역이 필요없을 정도로 플랫폼이 발전했다. 이제는 그만 할때도 됐잖아. 그런데 정보의 첩경, 정보의 수문장, 최첨단의 실세인 IT업계, 그를 대표하는 책들이 PDF로만 쏟아져 나오는 건 대체 무슨 심보일까. 가장 진보를 달려야 할 책들이 대체 왜 아직까지 대다수가 PDF로 나와서 플랫폼에 연계도 안되는 줄긋기와 문자 인식 등으로 나를 괴롭히는 걸까. 의문이 아닐 수가 없다. 무슨 이유일까? 누가 답 좀 해줘..

이 책도 PDF 형식으로 나를 괴롭혀서 나의 이 괴로운 심경을 잔뜩 토로해 보았지만, 사실 독후감으로 소모해버릴 내용은 아니었는데.

책은 역시나 이번에도 나의 기대를 배신한다. 제목이 내가 상상하는 내용과 일치하는 경우는 지극히 드문데도 왜 나는 항상 내가 기대한 내용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실망하고 마는 걸까. 내가 바라는 것이 그야말로 ‘마법’같은 일이라서 그럴테지. 모를수록 환상을 품고 쉽게 갈 수 있으리라 막연히 기대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간편한 지름길 같은 건 보통 없고, 정공법으로 천천히 나아갈 수밖에 없기에 실망하고 주눅드는 거지. 지금의 내가 그렇듯이.

이 책은 게임 디자인에 대해 조곤조곤 일목요연하게 설명하고 있다. 게임이 갖추어야 할 원론적인 것들을 많이 다루고 있어서 실제로 써먹기에는 조금 난해한 개념들이 많다는 점. 하지만 내가 프로그래밍을 처음 시작할 때 ‘이런 걸 왜 배워야 하는 거지?’ 했던 것들이 지금에 와서는 기반이 되어있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것들이 게임 디자인의 기반이 되는 걸테지.

얼마 전 다시 한 번 인디 게임 더 무비를 봤는데 슈퍼 미트 보이의 게임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전에는 읽지 못한 디테일을 보며, 별 것 아닌 것 같은 그런 디테일들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이제는 사실 익히 아는 숨겨진 튜토리얼, 레벨 디자인으로 행하는 튜토리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옛날 처음 이 영화를 볼 때는 저 정도는 당연한 거 아니야? 라고 생각하며 흘려버렸던 그런 것들이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들이었다.

이 책은 컨셉, 프로세스, 실행의 세 파트로 나누어서 게임 개발에 대해 설명한다. 후반으로 갈수록 실질적인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지므로 독서도 그에 맞춰 서서히 고조되어간다.

책에서 재미있었던 부분을 몇 가지 뽑자면.

규칙은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고, 전략을 만들며 플레이 경험에서 재미를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몰입 상태는 게임 디자이너가 추구할 수도 추구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 사항이다. 디자이너는 게임을 통해 얻고자 하는 가치에 따라 이를 선택하면 된다.
나오미는 헨타이 아니메의 요소 중 제3의 성, 즉 촉수 괴물의 성별이 모호하다는 점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처음엔 어떻게 활용할지 확신이 없었지만, 나오미는 이 점을 동성애의 완벽한 은유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게임 디자인과 다른 많은 디자인 간의 큰 차이가 바로 이것이다. 무언가를 편리하게 만드는 대신 게임은 재미, 도전, 분위기를 강조하는데, 그래서 가끔 쉬운 사용성보다 더 까다롭게 만들기도 한다.

이 정도. 규칙이라는 제약이 주는 재미, 몰입이 게임의 필수요소는 아니라는 점, 기존의 것을 뒤집어 생각할 것, 가장 최적의 디자인을 추구하면 개성과 재미를 잃을 수 있다는 점. 내가 생각하지 못한 지점들을 그때 그때 잘 짚어주는 책이었다.

그럼에도 1인 개발에는 조금 적용하기 힘든 부분들이 많아서 읽기 힘들었다. 프로토타이핑 부분이 특히 좀 힘들었는데, 아무래도 잘 와닿지 않아서. 프로토타입의 종류들을 나누는데 ‘프로토타입 코드는 버려야 하는데 여기까지 구현해놓고 버려도 되는걸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많은 걸 요구하는 프로토타입도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려나.

아무튼 책은 재미있었다. PDF는 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