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편 소설을 좋아한다. 단편 소설의 그 뚜렷한 기승전결이 여러번 롤러코스터 코스를 돌듯 휘감기는 장편 소설보다 인상적이랄까, 와닿는 느낌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국도와 고속도로의 차이. 국도를 타고 가다가 보면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내려서 사진 한방이라도 박을 수 있지만, 오래 걸리고 또한 도착지점으로 향한다는 목적이 흐릿한 느낌이라면 고속도로를 타고 가면 그런 잔재미는 없지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는 느낌은 국도보다 훨씬 명확하다. 피로도도 훨씬 덜하고.

그러니까 단편 소설집을 안 좋아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가격마저 저렴하니. 지금 당장 읽지 않더라도 사서 쟁여둬야 할 이유로는 충분하다. 했다..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그런 심정으로 구매한 책을 이번 설날을 기회삼아 다 읽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 읽는 고속도로같은 책이었다.

시작하는 이야기는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워낙에 유명한지 제목을 자주 들었던 글인지라 기대하며 읽었다. 퀴어 소설이다. 내가 성소수자는 아니지만, 현실감이 몸을 떨었다. 단순히 남성과 여성의 사랑에서 성만 살짝 비튼 느낌과는 달랐고, 그래서 그 보수적인 형과의 연애의 끝, 그리고 엄마에게 당한 폭력의 끝을 감정적으로 깊이 이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너도 나도 우주라면 이 책도 우주라고 할 수 있을테니까, 우주를 읽은 셈이었다.

현실감. 소설의 중추는 아닐지언정 가장 강력한 조미료의 위치는 분명히 점하고 있을 감정이다. 그 현실감의 디테일은 다음 이야기, 공의 기원에서 맥스치를 찍고야 만다. 그야말로 픽션으로만 채워넣은, 은유 아닌 직유로만 빠르게 ‘공’과 ‘역사’를 비틀고 있는 이 소설은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너무나 심하게 흩어놓아서 오히려 어디가 현실이고 어디가 가상인지 궁금하게 만든다. 이건 가짜? 진짜? 미스테리물을 읽는 기분이었는데, 사실 그래서 조금 내 취향이 아니었다. 잘 만든 이야기긴 했지만. 너무 현실적이어도 문제로구나.

시간의 궤적은 자신과 외부의 관계를 다르게 다루는 두 여자의 이야기. 시작점은 전형적이지 않음으로 같았지만, 끝은 다르게 끝나는. 선택의 중요성과 그 불안함과 슬픔과 아련함이 담긴 이야기였다. 다음 이야기 넌 쉽게 말했지만도 비슷한 맥락이다. 다음 한 걸음을 어떻게 내딛어야 할지 선택하지 못한 주인공의 이야기.

‘우리들’은 서로의 관계를 상징하는 어떤 것, ‘글’, ‘나’를 끌어당겼다 실패하는 이야기, ‘데이 포 나이트’는 파괴적인 관계를 해석하는 이야기, ‘하긴’은 지극히 세속적인 눈으로 보는 엘리트층 부모의 적나라한 욕망을 드러내는 이야기. 이야기와 이야기가 쌓여서 이루어진 책은 마치 국경을 넘나드는 것처럼 그 풍경을 180도로 바꾸곤 했다.

현실감과 이야기의 기승전결, 감정선, 하지만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여러가지 것들을 보고 느끼며 책을 덮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될 순 없지만 다른 사람인 척 할 수는 있었다.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