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걷고 있다. 이를테면, 산책 중이다. 상쾌한 기분이 탄환처럼 머리 가운데를 꿰뚫는다. 콧노래가 나온다.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한 확신이 발걸음에 가득 담겨서 헬륨 가스처럼 가볍기만 하다. 룰루랄라. 그렇게 신나게 바닥을 박차며 걷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몇 시간을 한강공원이든 뭐든 걷다 보면 결국 진이 빠지게 마련이다. 내가 왜 집을 나와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거지, 다리를 두드린다. 그리고 내가 걸어온 길을 슬쩍 되돌아보게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마냥 신나게 걸어왔던 길이 길게만 느껴지는데, 다행히도 산책은 그 길을 돌아가는 것으로 끝맺게 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니까,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안도를 품게 한다. 그렇게 지친 몸을 이끌고, 산책에 마침표를 찍고 집으로 돌아가면서도,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에 좌절하지 않는다. 돌아가고, 잊어버린다. 나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내 마음 속에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활성화 되었는지 관심을 가질 새도 없이 증발한다.

하지만 산책에 대한 소설을 쓴다면 이렇게 흘러가면 안될 것이다. 쓰고 있는 나도 쓰는 와중에 잠깐 졸려서 책상 위에 엎드릴 뻔 했으니까, 읽는 사람이라면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테지.

김연수님은 주인공이 이렇게 아무런 변화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에 이렇게 일침을 놓는다.

시드 필드 같은 시나리오 작가는 모든 영화는 시작하고 삼십분이 지날 무렵에 첫번째 플롯 포인트를 지난다고 말한다. 대개 백이십 분짜리 영화라면 첫 플롯 포인트는 삼십 분에, 두번째 플롯 포인트는 구십 분쯤에 있다. 이 지점을 지나면 이야기의 방향이 크게 바뀌면서 주인공은 이전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서 특히 첫번째 플롯 포인트를 가리켜 ‘돌아갈 수 없는 다리’, 혹은 ‘불타는 다리’라고도 부른다.

돌아갈 수 없는 다리, 불타는 다리를 삽입하여 이야기에 떠밀리는 주인공을 만들라는 말이다. 사건 중심이든, 캐릭터 중심이든, 이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지나간 이야기는 권총의 트리거를 당긴 탄환처럼, 활의 시위를 걸친 손가락을 빼낸 화살처럼 사건의 중심을 향해 자의로는 멈출 수 없는 움직임을 시작한다.

내가 멈출 수 없는 것, 즉 인간 본연의 본능을 위배하는 것을 안전한 곳에서 지켜보는 건 꽤 흥미진진하다. 나서서 롤러코스터를 타거나 번지 점프를 하거나 스카이 다이빙을 시도하는 이유처럼, 인간은 일정 수준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무슨 짓이든 할 것 같다. 책 속에서 주인공이 불에 타 죽거나 소중한 사람을 잃거나 자살을 한들 그게 현실의 나의 안전을 찢어발기진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타인의 감정을 읽고 공감할 수 있다. 그렇기에 본인이 완전히 안락한 의자에 파묻혀서 책을, 영화를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손바닥에 긴장의 땀이 맺히게 된다. 그렇기에 불타는 다리를 등에 지고 걸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는 우리들은 안타까움과 재미와, 어찌됐든 불타버린 다리를 주인공과 함께 건너게 되는 것이다. 밤을 새며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시청해 버린다.

굴복하지 않는 이야기, 그리고 아무리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결국 마음의 신념이 깨지지 않는 이야기는 우리가 뻔히 알면서도 행동하지 못하는 걸, 불타는 다리를 등지고 결국엔 해내버리는 주인공이 있기 때문에 신성하고 또 가련하고, 위대하다. 겨우 하루 중 최고의 모험이 ‘산책 나가기’, 그것도 돌아올 길이 보장된 평이한 산책인 우리같은 범인도 이야기를 보고 변화하는 주인공을 읽고 그 감정에 동조하며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책을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다리에 불씨가 내려앉았다.

이 책도 그런 책이었다. 내 뒤에 있는 어떤 다리를 불살라 버렸다. 나는 책을 읽은 시점에서 어떤 다리가 불살라졌는지 알 수 없어졌다. 뭐랄까, 돌아갈 곳이 없지만 안정감이 느껴지는 묘한 느낌이랄까.

김연수님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소설가는 그가 어떤 정치적 신념을 지녔든 진보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소설은 변화의 이야기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정체로는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뿐이었다.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