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글

사소한 걸 끌어모아서 어떻게든 족적을 남기려고 해봤다가, 타성에 완전히 절어버린 글들이 쭉 나열되어 있는 걸 돌아본 뒤 허탈해져 완전히 손 놓아버린 지 1년이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시간을 인지하는 기관이 무뎌진다고 한다. 내 시간을 인지하는 기관은 작년부터 오늘까지, 딱 1년 안에 얼마나 퇴화한 걸까. 왜 어제처럼 느껴지는 걸까. 시간 외의 감각기관은 이번에도 현실을 부정하면서 지금 상황을 타계하고 싶어하지만 이렇게 명확한 증거 앞에서는 코난이나 김전일이 올 필요도 없이 사건 종결이다.

아무튼.

개발 일지를 쓰지 않은지는 1년, 정말 딱 1년이 지났지만, 그 동안 개발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커피 한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숨을 고르는 게 습관이 된 만큼 평일에 블록 어태커를 개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과연 이걸 다 개발하고 나면 이 습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그런 걱정 때문에 진도를 재빠르게 나가지 않는 건 아닐까, 나 자신에 대해 의심스럽지만, 이번 사건은 확실한 물증이 없으니까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 불가능.

이번에 이렇게 간만에 일지를 남겨볼까 하는 욕구가 불끈거린 이유는 그간 가슴 속에서 계속 꺼끌거리던 ‘전투’부분을 완전히 뜯어고쳤기 때문이다. 게임이, 코어 재미 요소가 재미가 없으면, 글이, 도입부가 논문 뺨치게 지루하다면, 어떤 게이머가, 독자가 눈길이라도 줄까. 그렇게 계속 가슴을 에는 심정으로 칼을 갈아왔건만 내 게임의 전투는 난공불략의 요새처럼 단단하게, 혹은 무소불위의 장군처럼 강력하게 재미가 없었다.

그 결과 처음에 상정한 기본 전투 로직, 이 게임의 시작점이 된 로직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김연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편소설을 쓸 때, 플롯과 관련해서 경험하는 가장 신비한 일을 완벽한 플롯을 짜면 짤수록 그 소설을 끝낼 수가 없다는 점이다.

내 플롯이 완벽했다는 건 아니지만.

작업

아무튼 ‘엎는다’는 결심을 먹은 것만으로도 게임은 빠르게 진행됐다. 였다면 좋았을 테지만. 예컨데 기존의 것을 버리는 건 도자기를 깨뜨리는 명장의 심정이다. 기존 도안을 버리고 새로운 도안을 짜는 것, 그것 만으로 도자기가 아름다울지는 명장 그 자신도 모를 것이다. 아무튼 눈물을 머금고 기존 것들을 딜리트 딜리트 했다.

새롭게 만든 전투는 몇몇 옛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서 아이디어를 취합했다. 사실, 어느 정도 만들어진 지금도 이게 ‘와 재미있다!’하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많은 피드백들이 ‘기존보다는 낫다’는 평이어서 알게 모르게 씁쓸하면서도 미소 지어진다. 복잡미묘하다. 알싸한 웃음이랄까.

screenshot

전투는 뭐, 이런 느낌이다. 이전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전투가 되어버렸다. 일단 전체적으로 의도가 명확해졌다는 부분이 마음에 들고, 가만히 서서 칼만 휘두르던 캐릭터 이미지에서 이제는 앞뒤로 움직이는 역동적인 형상이 되었다는 점도 좋다. 물론 쌓아온 리소스들을 폐기하고 코드를 걷어내야 했지만..

참고로 이전의 전투 화면은 다음과 같다.

screenshot

딱 봐도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프레임이다.

사실 처음 기획, 이랄지. 아이디어만 가지고 있을때만 해도 나는 복합적인 구조를 생각할 수 없는, 초짜 프로그래머, 프로그래머를 넘어서 개발자, 일 뿐이었다. 사용자 경험 같은 건 고려할 필요도 가치도 느끼지 못했을 때의 기획이니까 가시적으로 어떤 가치가 있는 결과물이 나오기 힘들었다.

..는 핑계에 불과하겠지. 아무튼 재미를 정량적으로 측정해서 ‘이건 안된다’라고 판단하기가 힘들 때는 그냥 최대한의 피드백을 받아서 거기에 수긍하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 고집 부리지 말자는 사실들이 내 지나간 시간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인두로 지지는 그런 작업이었다.


맺음 글

작업이 얼추 마무리되고 기존 튜토리얼까지 쥐어 뜯어서 어느 정도 갈무리가 되어가는 시점에서 이 벅찬 감정을 글로나마 남겨두고 싶었다. 너무 오래 안 쓴 것 같아서 부채의식도 있고.

작업을 하나 넘어설때마다 ‘해냈다’ 하는 벅찬 감정보다는 ‘다음으로는 뭘 해야 하지’하는 걱정이 앞선다. 이를테면 쓰레기더미가 가득한 집 안에서 한 무더기 쓰레기를 치워도, 언제 다 치우나 하고 허리를 토닥이는 격이다.

이것도 언젠가는 끝이 나겠지. 조금만 더 체계적으로 시스템을 세워서 올해 안으로는 끝내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