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여행의 이유
한 때는 여행하며 다니는 삶을 동경하기도 했었다. 육신이 어느 공간에 묶이지 않는다니, 상상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아무래도 그런 불가능성은 늘 나의 관심을 끈다. 로또부터 시작해서 미시적으로는 게임의 모든 업적 달성같은 것. 그런 순수히 불가능한 게 아니라 일말의 가능성을 남겨놓은 불가능성이 내 앞을 가로막게 된다면 나는 나도 모르게 도전욕구를 불태우게 된다. 나에게 있어 여행이라는 것도 어떻게 보면 그 가능성의 여지를 남겨둔 불가능과 한없이 가깝고, 그래서 어쩔 수 없게도 동경하게 된다. 로또 1등 당첨자, 게임을 100% 클리어한 게이머를 동경하는 그런 심정으로 동경하게 된다.
그런 동경하는 마음으로는 사실 실재하는 삶과 연결시키기 어렵다. 그냥 작은 행동이 나비의 날갯짓이 되어 나의 삶을 송두리째 바뀌길 바라는 정도는 쉽게 해볼 수 있겠지만서도, 실제로 나의 모든 삶의 양식을 뒤틀고 흔들어서 그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라, 한다면, 글쎄. 과연 내가 쉽게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결론. 그렇기에 내가 주말마다 여행을 떠나지 않고, 평범한 주말을 보내고, 마음 한켠에 남은 불만을 안고 힘겹게 월요일 아침 몸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독서도 어떻게 보면 여행과 비슷하다. 김영하님은 글쓰기를 여행과 비슷하다고 했지만, 아무튼 궤는 비슷하다. 실물의 영역을 거닐고 다니지 않을 뿐, 사람마다 같은 활자를 읽고 다른 경험을 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의 깊이가 이번 독서(여행)을 투과하여 새로운 경험과 지식을 만들어낸다. 마치 재귀처럼 반복하고, 반복한다. 언제까지나 계속 하면 스택 오버플로우까지라도 닿을 수 있는 것일까? 원펀맨처럼 리미트를 깨뜨릴 수 있을까.
책의 자극적인 마케팅 문구, 이 책을 쓰는 데 본인의 모든 여행 경험이 필요했다는 부분은 참 유혹적인 문장이다. 단지 한 권만으로 한 사람의 그 ‘모든 여행 경험’을 자기화 할 수 있다는데, 손이 가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더욱이, 김영하님은 여행을 많이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평생의 여행 경험을 만원돈에 한번에 습득할 수 있다니 그야말로 공짜나 다름 없다. 하지만 마케팅 문구가 늘 그렇듯이, 당연히 과장이다. 다 읽고 나면 ‘과장이 심하시네.’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내 여자친구는 이 책에서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를 굉장히 감명 깊게 읽었다고 했다. 책은 일부분만으로도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 수 있고, 그것만으로도 구매할 당위성을 채울 수 있다. 그 책의 모든 부분이 너무나 완벽하고 익히고 배울 것이 넘친다면, 어후. 생각만 해도 피로하다. 책도 롤러코스터처럼 적당한 밀당이 필요하다.
나도 몇 번 호텔을 즐겨온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이 문장에는 통렬히 공감하게 된다.
기억이 소거된 작은 호텔방의 순백색 시트 위에 누워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힐 때, 보이지 않는 적과 맞설 에너지가 조금씩 다시 차오르는 기분이 들 때, 그게 단지 기분만은 아니라는 것을 아마 경험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책은 이런 작은 여행부터 큰 여행까지, 심지어 간접 여행까지 두루 포괄하는 글을 쓰고 있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와 방랑벽에 대한 에세이에서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생각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은 방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적고 있다. 철학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들, 이를테면 사상은 옥수수같은 곡물과 달리 안정적인 수확을 기대하기도 어렵고 모두가 좋아하는 것도 아니어서 한곳에 머물기 어렵다는 것.
다른 사람을 시켜 대신 여행하게 하고 자신이 나중에 그것을 재구성하는 데에는 어떤 이점이 있을까? 바야르에 의하면 그것은 ‘어떤 타자를 감수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여행했을 때에는 놓칠 수 있는 것을 타인을 통해 경험하는 것, 타인이 놓쳤을 어떤 것을 상상력을 동원해 복원하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의 정신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보았다.
역시 하나의 경험에 침체되어 거기에 파묻혀 버리는 건 위험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경험이 진리이자 세상의 중심이 아님에도 일순 그렇게 느끼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경험, 특히 타인의 경험이 중요하지 않을까. 요즘 세상처럼 타인의 경험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귀와 눈을 막고 산다는 건 참 비효율적이다. 난 정말 비효율의 극치로구나.
여행을 위한 심리적인 불안감이나 선을 넘어 나아가는 법 같은 나처럼 소심한 사람을 위한 지침서는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은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실제로 김영하님은 숨쉬듯이 자연스럽게 여행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점들이 있다는 점조차 쉽게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만. 원래 자신과의 싸움은 자신이 끝내야 하는 거니까.
아무튼 여행과 책과 이야기와 신화가 적절히 버무려진 책이었고, 결국 경험에 대한 이야기다. 타인의 경험은 늘 흥미롭다. 내가 겪을 수 없는 불가능성에 한없이 가까운 경험이기 때문일 것이다.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