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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가만히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누군가가 나에게 3만원을 쥐어주며 이 방 안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것을 사오라고 하면 가장 먼저 달려나가 집어올 법한 그런 음악이다.

단지 몇 음절의 전주만으로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음악을 한 두개쯤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바닷가에서 조개 껍질을 주워모으는 심정으로 그런 음악들을 하나 하나 고르다 보면 어쩐지 마음이 아련하다. 조개 껍질에 딸려오는 그 어떤 편린들이 까슬거리면서도 부드럽고, 또 어떤 면에서는 슬프면서 또 어떤 면에서는 즐겁다. 특히 전주만으로도 가슴을 벅차게 만드는 음악들은 심하다. 심하고도 심하다.

그렇다고 해서 나에게 그런 음악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냐고 묻는다면, 음, 글쎄. 즉시 대답하기는 힘들다. 온전히 내 비루한 기억력 때문이다. 덕분에 넓고 넓은 인터넷을 유영하다가도 생각치도 못하게 암초처럼 톡 튀어나온 어떤 음절에 가슴이 떨리는 경우가 잦다. 원래 그 음악을 사랑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음악을 들었던 잊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예컨데 외국을 여행하던 중에 만난 지인같은 것이다. 과하게 친한 척을 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의 유대가 더 끈끈한 법이다. 매일 매일이 새롭고 낯선 현실을 살아가면서, 그 옛날의 기억을 만나, 또 그렇게 사랑하는 음악이 늘어가는 것이다.

뭐, 하지만 지금 말하는 노래는 그 나쁜 기억력 틈바구니를 비집고 그 옛날부터 살아남은 노래지만.

2005년 무렵 쯤의 난 J-POP을 주류로 듣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그런 흔한 보통 학생이었다. 김영하님은 작문 수업에서 ‘그냥 평범한 직장인’이라는 캐릭터 설정을 해온 학생에게 ‘그냥 평범한 직장인’은 없다고 했다는데, 거기에 비추어보면 사실 나도 그냥 평범한 오타쿠는 아니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만의 세계로 파고드는, 늘 웃는 얼굴이지만 어딘가 음침한 구석이 있는 그런 캐릭터였을까. 그 미묘한 음침함을 품고선 늘 뭔가를 끄적이곤 했는데 떠올려보면 공상에 빠져있는 시간이 현실을 살아가는 시간보다 길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의례히 생각하는 그 ‘그냥 평범한’에다가 음침함을 첨가하면 그게 바로 그 시절의 나였다.

지금의 문장력으로 역추론하면 의외겠지만, 그 때의 나도 글을 썼었다. 지금의 내가 이렇게 앉아서 컴퓨터를 마주하고 있는 것과 거의 같은 모습을 하고서. 그러니까 인상을 찌푸리며 앉아서 한켠에는 글을, 한켠에는 인터넷을 두고 인터넷에 치중하는 모습. 글을 쓰는건지 인터넷을 하는 건지.

나는 자신을 주로 비주류라 정의하는데, 이때의 나도 이미 충분히 비주류였다. 정말 더할나위없이 비주류의 글을 쓰고 있었다. 나만 재미있는 글을 생산하고 나 자신이 그걸 소비했다. ‘글을 쓴다’, ‘상상력을 구현한다’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고 독자에 대한 배려는 없는 그런 걸 끈덕지게 써내려갔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때의 이 글이 내 초심의 정가운데 아직까지도 버젓이 버티고 있다.

글쓰기는 끈질김을 요구한다. 글자 하나 하나가 문장으로 연결되어 나오는 데 걸리는 시간, 그리고 그 연결과 연결 사이를 다시 매끄럽게 연결하는 시간 등은 이런 글을 써야겠다, 하고 초벌 상상하는 와중에는 잘 와닿지 않기 때문에 글이 구체화 하는 과정이 지지부진, 지겹게 느껴지고는 한다. 결국 몇 자 쓰다가 금방 키보드에서 손을 놓아버리기가 부지기수다. 하지만 일정 분량을 넘어서기 시작하면 글쓰기 양상은 달라진다. 어느 정도 만들어진 코드에 대해선 그 틀을 부수고 완전히 새로 구성하기 싫어지듯이 글 역시도 지금까지 쌓아올린 과정이 아까워서라도 그 버리는 과정까지 닿기가 어려워진다. 뭐가 됐든 아무튼 쓰게 되는 지점이 있다. 말하자면 그때 그 시절 쓴 ‘그’ 글은 내가 처음으로 그 ‘지점’을 넘어선 글이었다.

비록 아까워서지만서도 ‘그냥 계속 쓴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이 점점 확장되었다. 글이 낳은 글은 더 넓고 깊은 상상력을 요구해온다. 그것은 운동을 한계까지 밀어붙이고 난 후에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커피를 한잔 하면서 침대에 눕는 경험과 비슷하다.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나아감을 상상하며 행복해진다.

그 상상력의 구심점이었던 캐릭터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루우다. 커다랗고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쓴 까칠한 마법사. 모자와 이름은 스퀘어에닉스 게임, 듀프리즘의 주인공에게서 따온 것이었다. 결국의 결국엔 그가 여행을 끝내는 모습을 지켜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가 겪은 여행이 남긴 뉘앙스는 내 마음에 잔류한다. 아직까지 그를 반복적으로 복기한다. 내가 만드는 모든 이야기는 그 뉘앙스를 아직까지 벗어나지 못한다. 김연수님은 누구든 첫 번째 작품은 보통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게 된다고 했는데, 내 자전적 이야기가 바로 그 이야기일 것이다. 나는 결국 이 ‘루우의 이야기’를 끝내야 다음 이야기를 구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예감을 늘 느낀다.

내 중심이 된 이야기, 루우의 이야기와 함께 한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mp3가 한창 부흥할 때의 일이었고 그래서 그 때의 나도 음악이 없으면 살수 없을 지경이었다. 음악 중독법이라는 게 있다면 진즉 잡혀들어가고 말았을 것이다. 초범이 아니니 구형일테지. 여튼 그 때 그 시절 그 이야기와 함께했던 음악이 바로 이 곡, 그게 바로 Spitz의 ‘로빈슨’이라는 곡이다. 이 음악은 인트로만으로 내 가슴을 떨리게 만들고 루우를 상상하게 만들고 창의력이 엔트로피와 마구 뒤섞이는 경험을 하게 만드는 도입부다. 내 중심은 복합적이겠지만, 결국 이런 단편적인 것들이 서울 메트로처럼 엮여들어 만들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울역 부근엔 루우와 함께 이 음악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루우와 로빈슨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본 이유는 얼마 전 spitz의 cd를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앨범의 완성도와 이야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리스너들은 분노를 토로하겠지만 아무튼 유명하고 좋아하는 노래들만 즐길 수 있는 베스트 앨범은 가성비와 만족도를 모두 충족한다. 앨범이 하는 이야기가 아닌 그 노래 각각에 스며있는 내 경험의 이야기를 돌이켜보게 하고 그 물에 비친 듯 어른거리는 경험을 마주하는 나 자신마저 어른거리게 한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들락거리다 보면 내 창작욕도 뭔 일인가 빼꼼이 고개를 내민다. 긍정적인 경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