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언젠가, 아마도
책을 다 읽고 이렇게 키보드 위에 손을 얹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이유라면 각양각색으로 다양하게 적어둘 수 있겠지만, 역시 가장 큰 건 슬럼프 때문이다. 그래, 난 슬럼프라고 당당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사실 지금까지 나는 나의 이 현상을 슬럼프라고 정의하고 싶지 않아 끝없이 고개를 돌려왔다. 갑자기 다른 취미가 생겨서 그래, 그리고 그 취미 때문에 몸을 엉망진창으로 다쳐서, 그래서 운동도 못하고 그래서 라이프 사이클이 무너졌고, 그 정도 이유 때문에 잠깐 주춤하고 있는 거야, 뭐 이런 식으로 뱀꼬리 늘리는 게임을 하는 양 시나리오를 죽 늘려왔다. 요는 슬럼프는 아니고 잠깐 주춤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데, 결국 그게 슬럼프잖아. 그래, 난 슬럼프를 겪고 있다.
슬럼프는 평소에 하지 않는 생각을 하거나 평소에 가지 않는 장소에 가는 것이 제법 효과를 보이는 것 같다. 깜깜한 어둠 속에 갇혀 있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따금 좋은 생각이 들거나 새로운 곳에 가고 싶다는 상상을 하다 보면 그 전형적인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빛 같은 형상이 머릿속에서 탁, 하고 터지곤 하는데 그 빛을 잘 잡고 밖으로 기어나오면 그게 바로 슬럼프 탈출이겠지. ‘탈출’이라는 표현도 참,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재미있는 표현이다. 슬럼프를 어떤 ‘공간’으로 표현한다는 점이. 그러니까, 새로운 것, 공간을 환기하여 그 슬럼프라는 공간을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들어야 한다는 걸 매끄럽게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아무튼 슬럼프 이야기는 이제 차치하고서 김연수님의 ‘언젠가, 아마도’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나가보자. 여행 에세이다. 저번에 김영하님의 여행 에세이에 이어서 여행 시리즈. 이렇게 여러 에세이가 묶여있는 책은, 전에도 언급했던 것 같지만 참 읽기 오래 걸린다.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내 마음 속에서 무언가가 완결되어 버리고 그래서 다음 이야기로 바로 이어 달리기가 쉽지가 않다. 그러니까 100미터 달리기인줄 알고 달렸는데 달리고 나니 이어달리기라고 하는 셈이다. 마음이 굉장히 지친다.
김연수님의 글을 읽다 보면 참 사소한 것을 잘 짚어낸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이코노미석, 흡연, 낯선 사람, 맥주, 음식 같은 어떻게 보면 정말 사소한 것들에서 이야기를, 깨달음을 건져낸다. 생각이 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겠지. 그냥 굴러다니는 돌 하나에서도 뭔가를 느끼고 활자로 짜낼지도 모르겠다. 그런 사소한 내용들을 여행과 엮어서 잘 버무린 글들. 론리 플래닛에 연재했던 글들이라는데 내가 여행과는 사실 꽤 거리가 있는 사람이라서 론리 플래닛을 본 적이 없고 그 때문에 단 하나의 글도 나와 연관점이 없다. 덕분에 신선한 기분으로 완전히 독파했다.
글을 읽다 보면 여행의 그 신선한 기분이 공기처럼 폐 속을 들락날락하는데, 그 공기가 마냥 신선하지만은 않다. 어딘가 그리움이 가득하다. 그러니까, 여행지에서 평범한 일상을 그리워하는 여행자의 마음이다.
안뜰 쪽으로 난 조그만 창문으로 내다보면 1층에서 호스텔 주인 가족이 저녁을 먹는 모습이 보였다. 가만히 보노라면 그 단란한 모습이 배가 아픈 건지, 고픈 건지 더 이상 글을 쓸 맛이 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신선함을 찾아서 떠나는 여행은 늘 일상의 고마움으로 귀결하곤 한다. 평생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대체 뭘 그리워하며 여행하는 걸까. 일상이 여행인 사람이라니 상상만으로도 힘겹다. 비행기에서 추락하는 마음이다. 그렇다고 일상에 묶여서 여행 한 번 제대로 못하는 삶이 즐거운 건 아니지만. 일상에서 여행 에세이를 읽으면서 여행을 생각해 본다. 여행의 그 미묘한 들뜸과 함께 자동차를 몰고 싶다. 자연경관을 즐기고 싶다. 풀내음을 폐 속 깊이 밀어넣고 싶다. 하지만 일상의 고마움을 담백하게 덜어낸 여행의 고단함 때문에 엉덩이를 당최 뗄 수가 없는 것이다. 여행은 모험처럼, 그러니까 극단적인 선택지처럼 나를 포기하게 만든다. 여행은 이렇듯 순간적으로도 수많은 얼굴로 나를 공략해온다. 쾌락과 고통이 힘껏 섞인 정말 쎈 칵테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김연수님은 소설가의 일에서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소설에는 욕망을 지닌 주인공이 등장한다. 욕망하는 목표가 생기는 순간부터 그는 헤매게 돼 있다. 이 '헤맨다'는 말을 그럴듯하게 표현하면 여행이 된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는 일상의 시공간을 벗어나 새로운 시공간을 찾아가는 여행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다. 소설을 잘 쓰려면 더 자주 여행을 가야만 하는데, 여행을 가게 되면 소설가는 소설을 쓸 수가 없다는 것.
재미있는 이야기다. 게임 프로그래머도 비슷한 모순에 부딪히곤 하니까. 게임을 잘 만들려면 더 자주 게임을 해야 하는데, 게임을 하게 되면 프로그래머는 게임을 만들 수가 없다.
독서도 여행과 닮아 있다. 실행하기까지가 힘들고, 해버리면 너무 즐겁다는 점.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