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잡문이란 건 어떤 글을 말하는 걸까. 네이버 사전에서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라 기술한다.
1. 문학 일정한 체계나 문장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되는대로 쓴 글. 대체로 지은이의 감정이나 사상이 꾸밈없이 드러난다. 2. 문학 예술적 가치가 없는 잡스러운 문학.
당연히 하루키 님의 이 잡문집은 전자를 의미하는 제목일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지만, 불현듯 하루키 님은 두 번째 의미로 이 글들을 수집하고 짜집기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그도 그럴것이 이 책의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작가로 데뷔한 지 삼십 년 남짓, 이런저런 목적으로 이런저런 지면에 글을 써왔는데 아직 단행복으로 발표하지 않은 글들을 여기에 모았습니다. 에세이를 비롯해 여러 책들의 서문, 해설 그리고 질문과 그 대답은 물론 각종 인사말, 짧은 픽션에 이르기까지 실로 ‘잡다’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구성이 되었습니다.
작가로 데뷔하면서 생산한 수많은 글들, 그 수많은 글들 중에서도 어떻게 보면 짧게 목적만 달성하면 그것으로 모든 소명을 다했을 지도 모르는 그 파편들을 모으고 모은 것일테다. 무라카미 하루키 라는 작가의 이름을 보고, 또, 그 글들의 매력을 이미 몇 번 맛보았는데다가 이 작가의 글은 어떤식으로 맛보면 가장 맛있다는 걸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미 숙달하고 있는 우리같은 독자들에게는 아무리 봐도 2번 의미로 해석할 수 없는 글들이지만, 이렇게 따로 모아서 구성하지 않았으면 일반 독자, 하물며 다른 국가에서 살아가는 변두리 독자에게까지 결코 닿을 수 없었을 글들을 어떻게든 주워서 다듬고 원고지에 새롭게 옮겨가며 구성을 궁리했을 하루키 님의 모습을 제멋대로 상상해 보자면, 아무래도 2번 의미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이 글들을 다루진 않았을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렇게 잡문’집’으로 편집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우리 독자들에게 ‘잡문’으로 다가서지 못했다면 아마 글의 원본, 원본의 원본들은 하루키 님의 서재, 컴퓨터, 혹은 먼지 가득한 창고같은 곳에서 캐캐묵은 먼지들과 함께 썩어나가다가 저도 모르게 재활용 되거나 Shift+Delete 를 당해서 이 세상에 나온 적 없었던 것마냥, 아니 이 세상에 나왔었다는 작은 힌트 정도만 세상 어귀에 남기고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러니까 이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편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의 글들은 2번 의미를 탈피했다. ‘문학 예술적 가치가 없는 잡스러운 문학’이었던 것이 하나의 것으로 묶여서 ‘예술적 가치’를 생산하는 모습은 쓰레기로 만든 예술품, 그리고 나뭇가지 하나는 꺾지만, 세개는 부러뜨리지 못하는 형제들의 이야기 같은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다시 강조하지만 하루키 님이 그런 의도를 가지지 않았을까, 하는 작가적 관점에서의 상상이다.)
책의 글들은 그야말로 정말 ‘잡다’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차례만 봐도 정말 이것 저것 집히는 대로 묶었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와 동시에 이 많은 주제들을 다뤘다는 사실에 경외감도 느낀다. 그리고 그 글들을 몇몇 미발표 작품을 제외하고서라도 어느 지면이든 실어냈다는 것에까지 이르면 혀를 내두르게 될 지경이다.
특히 인상적인 건 우리나라 ‘대구 지하철 참사’가 떠오르는 ‘옴진리교 추종자들의 사린가스 테러’ 관련 글들이 인상적이다. 그 글이 암시하는 ‘우리나라는 일본이 지나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같은 누구나 느낄법한 공감은 차치하고, 하루키 님의 ‘작품’을 위한 그 어떤 노력, 자료 조사 등을 마주하고 있자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계속 쓰면 된다는, 글을 잘 쓰는 방법에 관한 대중적인 그 말이 되려 너무 편한 방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니체가 ‘어느 누구도 책이나 다른 것들에서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얻어들을 수 없는 법’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하루키 님도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의 범위를 넓히지 않고는 도저히 그들의 생리를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사린가스 테러의 피해자, 그리고 옴진리교 신자들의 인터뷰는 그런 맥락에서 진행되었을 것이다. 직접 살을 맞대고 같은 지점을 바라보고 공감하기 위함이었을 터다.
그렇다면, 그러니까 소설가의 마음가짐, 그리고 그 글, 이 작은 글들조차도 ‘이해한다’라고 말하려면 직접 부닥치고 몸을 비벼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결국 소설가의 마음가짐을 알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창작에 부딪혀 봐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고야 마는 것이다.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