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한참 소설을 읽을 때였나. 정말 가벼운 마음으로 어디 한 번, 나도 글을 써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실제로 내가 겪어온 작문이란, 가볍게 대충 휘갈기면 나오는 것 아냐, 싶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은 ‘가벼운 마음’ 따위로는 글이 나올 수가 없는데. 그렇게 나오는 건 그냥 생각의 흐름을 글로 옮긴 것일 뿐, 누군가가 읽어줄 만한 게 될 리가 없는데 말이다. 그래도 그 ‘가벼운 마음’이라도 먹었기 때문에 오만함을 조금씩 지워나가며 글자 세공에 공을 들일 생각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나의 글쓰기는 겨우 작년에야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 때, 글을 쓰기로 마음 먹기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준 글이 바로 장류진 님의 ‘일의 기쁨과 슬픔’ 이었다. 그날도 평범하게 코드 빌드 중, 남는 시간을 쪼개어 인터넷 서핑을 즐기던 차였다. 인터넷 서핑이란, 말 그대로 서핑이라 어떤 물살이 나에게 몰려올 지 모른다. 정말 낮은 파도, 바다에 휩쓸린 잡쓰레기, 해초 같은 것들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잡탕 속에서 서프 보드를 꽉 붙들고 헤엄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 날도 무심한 시선으로 몰아치는 그것들이 파도인지 쓰레기인지 선별하던 차였다. 그러다가 우연찮게 찾아들어간 곳이 바로 창비 홈페이지에 게재되어있는 이 글이었던 것이다. ‘판교 회사원’ 같은 문구에 끌렸던 게 아닐까. 그야말로 나를 관통하는 단어니까.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다 읽어내렸다. 읽을 동안은 숨을 참고 있었던 것 같다. 다 읽고 나서 숨을 몰아 쉬었으니까. 이 글은 일반적인 소설과는 달랐다. 뭔가 시크하고, 단조로웠지만, 그럼에도 내 마음에 가닿는 느낌이었다. 장르 소설에 더 가까운 재미, 라고나 할까. 장르 소설에 뿌리를 두고 있는 나에게 더할 나위없이 잘 맞는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글은 차분하게 스크럼이니, 프로그래머니를 다루며 스타트업을 적나라하게, 하지만 가감없이 드러냈다. 실제로 경험하지 않았다면 모를 그런 이야기들은 현실감을 가득 품고, 실제로 그런 일상을 지내오던 내 삶을 때렸다.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록 ‘가벼운 마음’을 먹긴 했지만, 그래도 시작은 중요한 법. 그 중요한 시작의 기점이 바로 이 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작가님에게 미묘한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 미묘한 부채감이 부채질한 결과가 바로 이 독후감. 책을 사서 읽고, 글로 화답하는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갚음일테니.

글들은 역시나, 재미있었다. 말 그대로 재미가 있었다. 남자로서 다소 충격적인 글도 있었다. ‘나의 후쿠오카 가이드’, 그리고 ‘새벽의 방문자들’ 이 두 글은 권력의 중심에 있는 내가 주변적인 시선이 되어볼 수 있는 좋은 창구였다. 특히 새벽의 방문자들, 의 경우에는 내가 가지고 태어난 걸로 얼마나 어떻게 누리고 있는지, 머리로만 알던 걸 객관적으로 한번 따져 볼 수 있었다. 그래, 난 정말 이걸 가지고 태어난 것이었다. 이 권력은 인지하는 순간 저주받은 능력이 되고 만다. 그 흔한 왕도물 만화책처럼 이 저주의 굴레를 벗어나 모두와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 자조적인 웃음이 나오고 말지만.

여자는 자신이 이 방에서 함께 서식하고 있는 바퀴벌레들 중에 딱 이 두마리만큼의 성인광고를 지우고 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도 제일 약하고 작은 놈으로.

끝으로 장류진 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게 무엇이든, 계속 쓸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