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대하는 자세만으로도 경외감을 주는 사람이 있다. 저런 점은 꼭 배우고 싶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사람이다. 어떤 점들이냐 하면 예컨대 친구들과 함께 밥이라도 한 끼 먹을라치면, 아 오늘은 내가 살게. 하면서 기꺼이 지갑을 열어젖힐 수 있는 자세, 조금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긴다면 마음 속에 꽁, 하고 숨겨두지 않고 그 즉시 이야기해서 서로간의 마음이 틀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자세, 관계가 틀어질까 겁내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펼칠 수 있는 당차고 강인한 마음 같은 것들. 그러니까, 우리 엄마의 이야기다.

살면서 가장 많이, 가장 오래 관계를 맺어 온 사람 중 하나인 우리 엄마.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쫓아 자주 울산으로 향하던 나는 이제 엄마의 곁을 완전히 떠나 타지에서 살고 있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울산이 가 있던 것이 그렇게나 섭섭하다고 고백했었는데, 아마 직장과 내 새로운 삶에 나를 빼앗긴 지금도 통용되는 감정일 것이다. 내가 다시 서울로 갈라치면 섭섭한 얼굴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이슬아 님은 이 책에 부모님에 대한 애정과 존중이 묻어나는 글들을 뭉텅이로 써 놓았다. 이슬아 님의 글은 이런 점이 좋았다. 나와 당신의 공감대를, 마치 필통 속에서 연필이라도 집어내는 것처럼 손쉽게 집어낸다. 뭐야, 어떻게 그게 연필인줄 알았어? 그렇게 되묻는 나 자신이 어리석게 보일 정도로 간단하다.

떠올려본 김에 엄마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본다.

생각해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참 앞으로만 알았다고 하고 뒤에서는 제멋대로 하는 아이였다. 그래놓고서는 뒷처리는 에라 모르겠다, 드러누워버리는 점까지 제멋대로다. 그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건 역시 엄마가 든든하게 뒤에서 받쳐주고 있었던 덕분이다. 엄마는 크게 불평하지 않고 내 뒷처리를 해주었다. 혼자서 버스마저 못 타던 시절, 엄마가 버스 수금통에 돈을 넣어줬기에 처음으로 버스를 탈 수 있었고, 그런 경향은 대학생 때까지도 이어지게 되는데, 대학교 월세집을 구하면서, 그리고 일년 반만에 그 월세집을 나가면서도 그 처리는 모두 엄마의 몫이었다. 어른이 되면 자동으로 그런 것들을 알아서 척척 해나갈 줄 알았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다. 어릴 때나, 커서나, 그 모든 일에는 용기와 책임이 따랐다. 물론 그건 모두 엄마의 몫이었다.

혼자서 처리하기 너무나 힘들고 괴로울 때, 이를테면 화장실 천장에서 물이 새서 부동산과 집주인과 이리 저리 조율하면서 신경전을 펼칠 때 같은 때, 간혹 엄마를 원망하기도 했었다. 엄마가 나를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서 나는 혼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른이 되어버렸다고. 부동산 아줌마의 신경질 섞인 문자를 받으면서 나는 이를 악물며 그런 식의 못된 생각을 했었더랬다. 너무 힘이 들면 못된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속이 니글니글해진 복희는 아직 본격적으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 아니다. 경리 아가씨로 취직하기 전, 미스 장으로 불리기 전, 그리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잔의 커피를 타기 전의 일이다. 끼니처럼 마시게 된 커피를 결국 끊기까지의 기나긴 세월이 스무 살 복희 앞에 놓여 있다.

아마 엄마도 나처럼 가끔 할머니를 탓하면서, 이를 악물면서, 그렇게 세상을 버텨냈던 거겠지. 그렇게 생각할라치면, 엄마의 자동차, 엄마의 가게, 엄마의 강아지, 엄마의 공간들을 연쇄적으로 떠올리면 왠지 마음이 아파진다.

그 옛날 어느 날, 엄마와 같이 저녁에 TV를 보면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아마도 모 청소년의 자살 사건을 여느 일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느 뉴스 앵커가 나즈막하고 무미건조한 말투로 읊고 있었다.

“나는 자살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도저히 모르겠더라.”

그리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덧붙였다.

“너도 그러면 안돼.”

“절대 안 그러지. 걱정하지 마세요.”

그 후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나는 어른이 되었고, 나는 그 시절엔 채 몰랐던 여러가지 것들을 알고 있다. 첫째로, ‘절대’란 없다는 것. 그리고, 너무 힘들때는 입 밖으로 소리내어 그 힘든 일을 부정하며 견뎌내고 싶을 때도 있다는 것.

아무튼 난 종종 엄마를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고, 그래서 가끔 경주에 가고 싶어진다. 이번 연말에는 경주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할머니도 가을이 되면 기분이 이상해. 이 계절에는 왠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야만 할 것 같거든. 삶의 중요한 이야기 같은 거 있잖아. 그래서인지 기분이 울렁거리고 좀 슬퍼지고 그렇더라, 할머니는.” ... 사방에서 가을이 느껴졌다. 복희가 탐이에게 말했듯 삶의 중요한 이야기를 쌓아가고 싶었다.

책은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