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근본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아무튼 곱씹기 위해서는 ‘타인’이 필요하다. 오늘도 나는 여러 방면으로 타인과 나를 비교하면서 나의 존재가 멀쩡함을, 아무튼 숨 쉬며 살아있음을 느끼고 안도한다. 예컨대 친구들과 카카오톡으로 오늘 또 하루가 시작되었음을, 업무를 시작했음을, 하지만 나는 재택이고 너는 회사고, 기획서에 정확한 기획이 반영되는 것의 중요성 따위를 논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재고한다. 그리고 타인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존재임에 안도한다.

소설을 읽는 이유도 아마 그와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내가 나임을, 타인의 삶에 감정이입을 할 수 있고 빠져나와서 나와 그의 차이점을 인지하고 또 그 차이점을 잘 운용할 수 있음을 아는 게 즐겁고, 어떤 면에서 서글프고.

소설은 대체적으로 아픈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도 그럴것이, 아프지 않으면 갈등도 없다. 나도 만약 어딘가 아프지 않았다면, 책을 읽지도, 독후감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픔은 너무 싫지만 아무튼 원동력이 된다는 점에서 미워할 수 없는 감정이다. 물론 밉지만,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다.

권여선 님의 단편집, 이 책에도 아픈 사람들이 잔뜩 등장한다. 딸과의 관계에서, 가난과 버림받은 가족관계에서, 소수자로서의 사회적 불안감에서, 기간제 교사로서의 알게 모르게 숨겨진 권력관계에서, 되물림된 가난의 정서에서, 가족 내부의 가부장적 권력에서, 시한부를 선고받은 고독에서, 남성성을 거세당한 남성을 바라보는 측은함에서.

보통 아픔은 외적 요인 때문이게 마련인데, 아픔들이 ‘아픔’이라는 단어 아래에 공통점을 가지듯이, 각양각색으로 보이는 원인들도 ‘원인’이라는 단어 아래 동일성을 확보한다.

아래는 ‘손톱’에서 발췌한 문장들.

그런 것도 상의라고 할 수 있나. 엄마에게 육상에 대해 물어본 거, 그게 소희가 엄마와 뭔가 상의한 거였나.
달리면서 소희 마음속에도 흉한 혹이 돋아났다. 다신 안 와. 다신 안 온다고. 언니… 안 온다고. 언니 그년… 안 와도 된다고. 영영 오지 말라고.

가난한 삶 속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되물림한 엄마, 그리고 언니. 그리고 상의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마치 재해라도 당하듯 삶에 휩쓸려 살아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울컥, 하는 마음이 드는데 이게 측은지심의 마음 때문인지, ‘나’ 속에 내면화된 것들 중 실제 나의 모습들을 봐서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다.

‘희박한 마음’의 커플 이야기도 흥미롭다.

어둠 속에서, 화났구나 데런, 하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래도 여자 혼자 산다고 말하지 않은 건 잘했어. 우린 겁우기니까, 데런.

여성, 노인, 성소수자, 사회적 약자의 측면을 고루 갖춘 데런이 삶의 곳곳에서 발견하는 어둠과 고독에서 난 깜깜한 방 안에서 몸을 웅크리고 훌쩍이는 나의 모습을 보았다.

아픔을 차례 차례 훑고 내려온 후, 나는 안도감인지, 용기인지 모를 그런 감정을 느낀다. 전자라면 정말 빌어먹게 나쁜 일이고 후자라면 대견한 일이다. 대견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선 독후감을 써볼까, 그랬다.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