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 혹은 예술가들의 삶이 궁금할 때가 있다. 저들도 분명히 나와 같은 인간일텐데, 지금 이 시간, 어떤 공간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지극히 사적인 공간에서는 대체 어떤 걸 하고 있을까. 엄마처럼 TV를 보고 있을까. 친구처럼 게임을 하고 있을까. 나처럼 컴퓨터로 글을 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예전엔 정말 메이저한 음악만 들었기 때문에 담담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들에는 통 관심이 가질 않았었다. 오지은님의 노래도 마찬가지. 나의 취향이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사회적으로 학습된 취향에 딱 들어맞는 노래는 아니었다. 나의 취향이 곧 사회적이었던 시기였다. 그냥, 날카로운 목소리구나. 우울한 목소리구나. 동경사변, 시이나 링고의 느낌이구나. 했었다. 그렇게 흘러갔다.

몇년 전. 오지은님의 노래를 다시 들었는데, 가슴이 찌르르 아팠다. 왠지 외로웠고, 이 외로움을 소장하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CD를 사게 됐다. 1집, 2집, 결국 3집까지 샀다. 그러고 나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오지은님의 노래를, 그 목소리를, 그 가사를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인정하고 나니 보이는 것이다. 오지은 님은 에세이 집도 몇 권이나 냈다는 사실이. 그래서 구매했다. 첫 번째로 구매한 책. 오지은 님의 노래이기도 한 ‘익숙한 새벽 세시’.

아마도 책은 우울할 것이다. 책을 펼치면서 직감했다. 우선 책의 제목이 새벽의 색감을 가득 품고 있는 본인의 노래 제목. 책의 첫 인상인 제목부터가 담담히 불면증과 떠나보낸 연인과 친구들과의 만남의 허무함을 표현하는 그런 노래 제목으로 지어버리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책은 과연 그랬다. 우울했다? 랄까. 기탄 없었다. 본인의 이야기를 하는데 스스럼이 없었다.

오지은 님은 마음이 아파서 정신 병원에 갈 때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짚어낸다.

인터넷에 정신과에 대한 리뷰는 없어서 근처에서 이름이 제일 예쁜 곳으로 정했다. 정형외과, 피부과와 다르게 리뷰를 안 쓰는 마음이 이해가 간다. 아이디를 걸고 말할 수 없는 분야겠지.

또한, 기계로 정밀한 측정을 할 때도 이런 생각을 한다.

나뭇잎을 보면 좀 평화롭게 기록되지 않을까 해서 계속 바라보았다.

이런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도 아마 용기일 것이다. 다소 진솔하고 담백한 문체로 본인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너무 리얼리티가 넘쳐서 조금은 닭살이 돋을 때도 있었다. 예컨대 일본에서 인터넷이 안되서 편의점에 들어가서 구경하는 척 하며 와이파이를 잡아 트위터를 잠깐 확인했다던가 하는 리얼리티. 너무 솔직한 것 아닙니까..

오지은 님은 최근 ‘아직 우울한 것 같아 다행이다’라는 팬의 말에 부정적인 기분을 느꼈었다고 트윗을 하셨었다. 사실 나도 가끔은 그런 기분을 느낀다. 불행을 많이 가진 사람이 더 좋은 작품을 만드는 건 아닐까. 행복에 겨운 소리인데다가, 불행한 사람 면전에서 ‘불행해서 좋겠네요.’, 무례하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실제로도 사실이 아니고. 불행이든 행복이든 본인이 보는 시야만큼 추출할 수 있는 것을.

아무튼 오지은 님은 우울함에 빠지고 싶어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 당시의 우울함을 표현했을 뿐일 것이다. 그 당시의 힘듦을 벗어나려고 한 것이 타인의 위안이 되었을 뿐일 것이다. 본인이 덜 탈출했다고, 좀 더 위안 받고 싶다고, 오지은 님께 아직 탈출하지 말아달라고 하는 건, 너무 자기본위적이다. 서로간 응원을 해도 모자랄 판에, 서글픈 일이다.

아무튼 너무나 디테일한 솔직함들이 넘치는 책이었고, 그래서 조금은 넘치는 듯한 메세지들을 받아 적으면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