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 마이어 : 컴퓨터 게임과 함께한 인생!

나는 팀에 이렇게 말했다. “잠시 반짝하는 것뿐이에요. 금방 사라질 겁니다.” 3D라는 말을 들으면 투박한 구식 비행 시뮬레이터, 그리고 거기에 수반되는 고생스러운 코딩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2D 타이틀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3D는 마케팅 수법에 불과하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자원을 독차지하는 문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름다운 3D 환경 구현에 엄청난 처리 능력이 소요되므로 나머지 부분이 희생될 것이 분명했다. 3D를 처음 접한 직후 30초 정도는 누구나 감탄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그 게임을 계속하게 할 본질이 없다면 의미가 없었다. 내게는 2차원이면 충분했다.
팀원들이 반대하는 것으로 볼 때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지만,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어릴 때, 그러니까 3D 가속 카드 따위가 필요했던 시절에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집도 좀 섞여 있었던 거 같기도 하고. 참 기본적으로 나는 보수적인 사람이구나 싶은 순간이 정말 하늘에 별만큼 많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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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3D로 만들면 어떨지 그냥 한번 재미로 해보죠.” 비참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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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요. 아니… 댁네 보트 좀 이상한 거 같은데요.”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아버지는 유쾌하게 손 인사를 하며 답하곤 했다. 보트에 올라탄 휘에는 괜찮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의미로 어렵게 익힌 항해 물리학과 바람을 이용해서 넓은 호수를 향해 능숙하게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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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해본 적이 없는 사람도 실제 항해가 어떤 느낌일지 알 수 있을 정도로 조종이 사실적으로 구현된 것은 처음이었다.


3D로 구현한 <해적!>의 장점. 무언가의 장점은 해보기 전에는 정말 알 수가 없는 것인가보다. 해보기 전에는 말이다. 해보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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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솔직히 나는 아직도 3D를 경계한다. 3D에 적절한 쓰임새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3D는 게임 디자이너가 게임이 아니라 영화를 만드는 중이라고 착각하게 하는 거의 환각에 가까운 효과를 낼 때가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플레이어 손목에서 오는 떨림에 실시간으로 반응하거나 플레이어의 기분에 따라 결말을 바꿀 수 없다. 그가 관객과 나누는 인터랙션은 아무리 깊이가 있다 해도 엄밀히 말해 일방적이다. 질투에 눈이 멀어 영화를 모방하느라 게임의 고유한 양방향 소통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면 최악이다. 이왕이면 아름다운 것이 더 좋다. 하지만 게임의 현대적 가치를 그래픽으로부터 떼어놓고 입증한 사례가 궁금하다면 멀리서 찾을 것 없이 <마인크래프트>를 보라.


각각의 장점을 살린 게임이 있을 뿐이지, 그래픽이 2D이든 3D이든 결국 형식의 문제일 뿐 아닐까. 즉, 3D를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재미가 아닌 기술에 집중하게 되는 경향을 경계한다고 해야 맞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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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재능을 누군가 발견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확실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의 아이디어가 좋다는 것을 증명하는 최고의 방법은 말이 아닌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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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 같은 요소도 불쾌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을까 봐 1편에서 제외했었다. 하지만 이 결정 때문에 유명해지면 무슨 선택을 하든 안 좋은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배웠다. <문명>의 인기는 학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명망 있는 여러 학술지가 기존 관념을 답습하며 서구 세계가 확장하며 저지른 범죄를 얼버무리고 넘어간다는 이유로 나를 공격했다. 310p

일단 봉인이 해제되자 내가 과거에 만든 게임에 대한 철학적 분석도 빠르게 뒤따랐다. 한 논문은 내 옛 게임을 “숨겨진 교육적 열망”이 드러나는 “문화적 주장이 알튀세르적이고 무의식적인 발현”이라 묘사하기도 했다. <해적!>은 알고 보니 모험극이 아니고 “계층적 현상을 약화시키려는 것처럼 보이나 궁극적으로 이를 강조해서 보여주는 비대칭적이고 불법적인 활동”이었다. 심지어 도 "유희적 기술 뒤에서 작용하는 이데올로기적 세력의 어두운 면"을 드러낸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상하게도 "헤게모니적 가정"으로 꽉꽉 채운 군사 게임들은 이러한 철저한 조사에서 열외였다. 게임의 의도를 명시해서 그랬던 것 같다.


사람의 세계관은 작은 행동 하나에서도 묻어나는 거니까 제작자가 어떤 의도를 심지 않았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묻어날 수 있는 것이고, 평론이란 그런 것마저 짚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일테지만… 과하긴 과하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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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에서는 모든 것이 재미를 위해 존재한다. 어쩌다 역사를 배우는 것이 즐거울 때도 있지만, 엄청나게 우울할 때도 있다. 우리는 플레이어에게 도덕적 명확성을 제공하고 고통스러운 딜레마를 제거해주어야 한다. 다른 형태의 스토리텔링과 달리 게임에서는 플레이어가 직접 주인공 캐릭터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이들의 자존심이 걸려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다뤄야 한다. 우리가 만든 칭기즈 칸은 패배를 목전에 두고도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목숨을 구걸하는 상대를 접하면 불편한 마음이 들며 그렇게까지 해서 얻을 가치가 있는 승리인지 의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합당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재미가 최우선 순위 중 하나임은 분명하지. 하지만 그저 다수가 불편해한다고 해서 소수의 담론을 무시하고 게임의 프레임을 짜도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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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우리에 관해 이야기하고 비판한다. 우리를 알기 때문이다. 게이머들이 마법처럼 학게에서 신뢰를 얻은 것은 아니다. 이들은 성장해서 학자가 되었다. 우리 스스로 만든 감시자이기에 이들의 불평은 이들이 우리를 얼마나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문화가 싹트기 위해서는 아마도 끊임없이 불평 불만을 나눠야 할 것이다. 사실 불평 불만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토론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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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든 게임이라면 플레이어가 학습 중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물론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얼마나 재밌게 배우고 있는지 학생이 자각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셜 매클루언(Marshall McLuhan)은 “교육과 오락을 구분하려는 사람은 이 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라는 재치 있는 명언을 남겼다.


학습이 곧 재미였던 시대도 있었을 것이다. 책이 곧 재미이고 검열의 대상이었던 시대가 있었던 것처럼. 물론 지금도 그렇긴 한데, 화살의 대부분이 영상이나 게임 쪽으로 넘어가는 추세니까. 새로운 문화로 유행이 넘어갈수록 그 전의 문화는 왠지 고급화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단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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