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여행 때 읽은 것 포함 1월 13일 ~ 1월 17일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김혼비

발야구는 지겨웠고 피구는 무섭고 아팠는데 어쩌다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면 둘 중 하나라서 ‘아 , 나는 운동을 싫어하는구나.’ 결론 내리고 초등학생 때부터 일찌감치 운동장과 멀어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축구공은 차 보지도 못했다. 당시 운동장을 누비던 많은 남자들이 자라서 조기 축구를 하게 되었다면 당시 운동장을 등졌던 많은 여자들은 축구와 조기 이별을 했던 것이다.


경험의 차이가 곧 차별

‘초보자도 딱히 상관은 없습니다.’ ‘초보자…… 뭐 , 괜찮습니다…….’ ‘초보자도 배짱 있으면 한번 와 보시든가.’ 같은 문장이었어도 충분히 고마웠을 텐데 심지어 환영이라니. 황송했다

감독과 만나 논의하는 시간이 있긴 하지만 편집은 고독과의 싸움이라 불릴 정도로 혼자 작업하는 시간이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난 고독과 싸운 적이 없었다. 아니 , 그렇게 편하고 조용한 애하고 대체 왜 싸우지?

어떤 집단에서 필요로 하는 효율성과 정치적 올바름이 부딪칠 때 후자가 전자에 당연히 자리를 내줘야 하며 , 그게 그 집단이 매끄럽게 제대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서인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이 무조건적 협력을 강조하면서 자주 쓰는 표현이 “우리는 한 배에 탔다.” , “우리는 한 팀의 선수들이다.”인데 , 지금 내가 하려는 게 바로 그 ‘한 팀’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올바른 것과 이득의 충돌은 사소한 팀의 결정들 사이에서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중 하나가 나야 나’라는 메시지가 매우 명확한 웃음이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 무슨 말인지 알겠죠? 공 잘 다루고 드리블만 잘한다고 다가 아니에요. 가장 중요한 건 위치 선정이에요. 볼을 안 가지고 있을 때 어떻게 움직일지! 패스를 해 주고 난 직후 어디로 움직일지! 이런 걸 정하는 게 바로 위치 선정이고 이걸 못하면 드리블 잘해 봤자 아무 소용없어요. 말하자면 다리는 젓가락이고 , 드리블은 젓가락질 , 축구장은 밥상인 거야 , 밥상. 젓가락질만 잘한다고 해서 밥 먹을 수 있는 거 아니죠? 그거랑 똑같은 거예요.”

그럼 저 비유에서 젓가락질(드리블)만 잘한다고 먹을 수 없는 밥(골) , 그 밥을 먹을 수 있게 만드는(골을 넣는) ‘위치 선정’에 해당하는 것은 대체 뭐지?


뭔가 하나씩 비어있는 비유처럼 엉성해도 그럴듯하게 굴러가는 축구단

“아부지!” (이곳에서는 시니어 축구팀 할아버지를 ‘아버지’라고들 부른다. 할아버지들은 여자팀 선수들을 ‘딸’이라고 부르고. 아…… 아주 룰부터 싹 바꿀거야…….) “아까부터 치사하게 왜 신입한테 계속 시비 걸어요? 아부지가 못하는 거면서. 진짜 말년에 이렇게 치사하게 살다 갈 거야?” 내 안의 유교 소녀가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이렇게 치사하게 살다 ‘갈 거냐’니.

그래 , 외모만으로 놓고 봤을 때는 예쁘장한 언니와는 좀 대조적이기는 했다. 하지만 , 하지만 외모를 두고 이렇게까지 대놓고 이야기해도 되는 걸까? 게다가 이게 끝이 아닐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은 뭐지? 내 머릿속에서 조그맣게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아아 , 아슬아슬하다. 좋지 않다. 가장 크게 웃던 , 우리 팀 최고령이라는 주복 언니가 은경 언니 등을 툭 치며 말했다. “그러니까! 은경이 너 늘씬하고 예뻐서 어렸을 때 남자들한테 인기 엄청 많았을 것 같은데. 그치? 많았지? 아유 , 근데 왜 하필 저 남자한테 팬티를 벗었어!” 축구는 대체 왜 팀 스포츠일까요.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며 내가 지금 들은 건 대체 뭐죠. 살짝 혼미해진 정신을 비집고 은경 언니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냐 , 언니. 내가 안 벗었어. 쟤가 벗겼지!”

“같이 축구하는 사람들 어때? 뭐 하는 사람들이야?” 축구를 시작하고 주변에서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이다. 여러 번 받다 보니 나중에는 이 질문에 숨은 속내가 ‘같이 축구하는 여자들 유별나지? 무섭지? 성격 세지?’ , ‘대체 뭐 하는 여자들이길래 축구 같은 걸 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축구라는 운동에는 어쩐지 ‘아저씨 냄새’ 같은 게 배어 있다.


운동과 이미지의 조합. 이를테면 등산도 비슷한 궤.

이렇게 운동 효과 면에서나 대외 이미지나 일상 활용성에서 모두 애매하디애매한 운동이면서 , 결정적으로 접근성까지 낮다. 다른 운동처럼 여기저기 배울 곳이 있고 정보가 널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경로로 열심히 검색해 봐야 하나씩 겨우 나온다. 이 모든 것이 여자들이 그라운드로 진입하는 것을 겹겹이 막으며 철통 수비하고 있다. 축구로 입문하는 과정 자체가 이미 하나의 축구인 것이다.

‘그냥 얼결에(모두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 , 얼결에!) 아무 운동이나 하게 됐는데 그게 축구였네?’라니. 아 , 평범해. 아 , 시시해!

어느 프로 축구팀의 어느 유명 선수가 끼어들 틈 없이. ‘축구’와 관련해서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자신의 몸에 새겨진 경험들로만 꽉 채워져 있는 여자들. 오 , 생각해 보니 이건 이거대로 멋있잖아?

축구 팬이라는 정체성이 노출되는 순간부터 좋지 못한 상황에 휘말려 드는 경우가 제법 있기 때문이다. 대개 둘 중 하나다. 귀찮아지거나 불쾌해지거나.

‘일부’ 남성들의 맨스플레인이 집중적으로 모여 ‘대다수’를 이루기 쉬운 곳은 , 사회 통념상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되는 곳이다. 자동차 , 컴퓨터 , 게임 , 건축 , 기계 같은 것들. 여기에 ‘스포츠’가 빠질 리 없다.

축구를 주제로 한 심층적인 대화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 감히 남자의 영역으로 겁 없이 들어온 이 여자가 대체 여기가 어딘지 제대로 알고는 들어왔는지 , 진짜로 들어와 있기는 한 건지 일종의 호구 조사를 펼치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우연히 잘생기기까지 하면 그야말로 최악이다. 맨스플레인을 즐기는 일부 남자들은 여성 축구 팬을 속된 말로 ‘얼빠’(얼굴만 좋아하는 팬들)로 단정하는 경향 또한 높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자가 남자와 똑같은 이유로 축구와 축구 선수를 좋아할 거라고 상상하지 못한다. 그 이유를 감정적이고 심미적인 이유로 축소시켜 놓아야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는 모양이다.

세상에는 전(前) 국가 대표 선수를 앞에 놓고 축구의 기본기에 대해 논하려고 하는 남자들이 정말로 있다.

완벽한 슛이었다. 그것도 로빙슛(lobbing shoot) , 완벽한 로빙슛이었다. 로빙슛은 공의 밑동을 톡 찍어 차서 골키퍼의 키를 살짝 넘기는 높고 느린 슛을 말한다. 이 슛의 짜릿한 점은 주장에게 트레이너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했던 남자 4호 골키퍼처럼 , 골키퍼가 손발에 매듭이 꽉 묶인 것처럼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하고 자기 머리 위로 느리게 날아가는 공의 궤적을 멍하니 바라보며 허망한 기분으로 골을 먹게 된다는 점이다. 빠르고 강한 슛보다 더 큰 굴욕감을 안겨 주는 슛. 공은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린 뒤에 통통 튀어서 그물에 살며시 안겼다. 2대 0.

그리고 그녀도 골대가 아닌 남자 1호 앞으로 공을 몰고 갔다. 이번에는 놀랍지도 않았다. 다들 아주 날을 잡았네 , 잡았어. 맨스플레인을 날려 버리는 우먼스플레이 대잔치의 날.

그날 이후 회사나 일상에서 맨스플레인하려 드는 남자들을 볼 때마다 주장의 슛이 떠올랐다. 살면서 본 가장 의미심장한 슛이 아니었을까? 거기에 담긴 메시지는 매우 명확했다. “나의 킥은 느리고 우아하게 너희들의 ‘코칭’을 넘어가지.” 느리고 우아하고 통쾌했던 , 잊지 못할 로빙슛! 러빙슛!

시니어 팀 감독 할아버지는 저 풋내기 초보의 나쁜 습관을 어떻게든 뿌리 뽑아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은 모양이다. 멀쩡히 진행되는 연습 경기는 관망하면서 구석에서 조용히 공과 우애를 다지는 나는 어찌나 날카로운 눈으로 관찰하시는지. 무료한 오전 , 무심하게 신문을 들여다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치열하게 ‘틀린 그림 찾기’를 하고 있는 부동산 아저씨 같다.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드리블도 어려운 일이고 , 누군가의 오해를 푸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드리블하면서 오해 풀기’ 같은 , ‘누워서 떡 먹기’의 완벽한 반대말 같은 것을 내가 할 수 있을 리 없다.

언니처럼 적극적이고 사교성 뛰어난 사람은 한 팀에서 한 달만 같이 뛰어도 금세 사람들과 돈독해진다. 그러고 나면? 딩동댕! 그 팀은 언니네 가게 고정 고객이 됩니다.

이들을 위해 언니는 어떤 날은 삼겹살을 굽기도 하고 어떤 날은 과메기를 떠 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양푼비빔밥을 한 대접 비비기도 하고 적절하게 깎아도 주면서 고객 관리에 최선을 다했다.(이제 이곳에 남아 있는 이자카야로서의 정체성은 ‘원피스’ 피규어와 고양이 인형밖에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몇 번 발길을 하고 나면 평소에도 괜히 한 번씩 더 들르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 언니네 가게에는 축구가 없는 날에도 축구팀 사람들이 서너 명은 꼭 있다고 한다.

우리 팀 축구 경기가 한 권의 책이었다면 두 트리오가 월패스로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장면들마다 책장 한 귀퉁이를 접어 놓았다가 나중에 다시 펴서 보고 또 봤을 것이다. 거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벅차오르는 무언가가 있다.

축구팀에 들어와서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은 축구인들끼리는 관계에 이상이 생기면 가장 먼저 패스에 민감해진다는 점이다. 아까 3차에서도 총무 언니가 “주장이 분명 나한테 뭔가 화가 나있는데 이유가 뭔지 모르겠네. 물어보면 말은 전혀 그런 거 없다고 하는데……. 아 , 신경 쓰여.”라고 몇몇 친한 선수들에게 속내를 털어놨었는데 , 왜 화가 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걔 요즘 나한테 패스 잘 안 하거든. 오늘은 어쩐 일로 주기는 줬는데 미묘하게 일부러 받기 어렵게 주는 것 같고.”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에게는 ‘말’에 해당하는 것이 축구인들에게는 ‘패스’인 게 아닐까? ‘싸워서 말도 안 한다’라는 표현 대신 “싸워서 패스도 안 한다.” , “싸워서 패스도 막 준다.”라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감독님은 자신의 뽑기 실력이 가져온 참담한 결과를 조금이나마 만회하려는 듯 “어차피 우승하려면 만나야 할 팀이잖아요?”라고 했다가 “어차피 우리가 우승하려던 팀은 아니잖아요?”라고 핀잔을 들었고 “그렇네요…….”라며 씁쓸히 웃더니 “전 그럼 다음 수업이 있어서 이만…….” 이라며 허둥지둥 사라졌다

화산의 나라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거대한 화산이 , 1910년에 마지막 분출을 했다는 화산이 , 104년 만에 갑자기 , 그것도 결혼 한번 해 보겠다고 잡아 놓은 날짜 언저리에 재분화를 시작했다는 이 믿기 어려운 소식에 매일매일 아이슬란드 항공 운항 정보 사이트를 새로 고침하며 저 먼 나라의 화산 상태를 세계의 지질학자들 다음으로 주시하고 , 화산 폭발 시기 예측에 대해 세계의 지질학과 1학년 1학기 학생들만큼 공부하던 내게 친구들은 “네가 기어이 화산까지 움직이는구나.” , “이런 마그마 같은 년 ㅋㅋㅋㅋㅋ” 따위의 문자들을 보내왔다.

오버래핑은 후방에 배치되어 있는 수비수가 공격 지역으로 달려 나와 공격에 가담하는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 수비수가 잠시 공격수가 되는 것이다. 실력도 활동량도 탁월한 선출들은 공격수 자리에 고정시켜 놓는 것보다 수비를 기본으로 하다가 때때로 공격에 가담하도록 하는 것이 팀 전력에 훨씬 도움이 된다. 감독님의 해맑은 전술 ‘수비도 잘하고 공격도 잘하자.’가 곧 오버래핑 정신의 구현인 것이다! (물론 감독님이 그걸 의도하고 말했을 리는 절대 없다.)

물론 갈 길이 멀다. 입단 2~3년차 중에도 아직 실력이 못 미쳐 경기에 나가지 못한 선수들이 있으니까. 현재 그들은 나보다 훨씬 잘한다. 그러니까 저기서 뛰려면 맨 뒤 , 그것도 수십 발자국 뒤에 겨우 서 있는 내가 전력으로 뛰어서 몇 사람이나 추월해야 한다. 이 과정 자체가 나에게는 거대한 오버래핑일 것이다. 잘하고 싶다. 정말 잘하고 싶다.

글 시작부터 지금까지 더워 죽겠다는 이야기만 내내 떠들고 있어서(시뮬레이션 액션이 아니다. 진짜 덥다.) 모두 눈치 챘겠지만 , 그렇다. 축구팀 한 해 일정 중에 가장 버티기 힘들다는 여름 시즌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선수들이 별생각 없이 몸을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 하나하나에 다 이유가 있고 원리가 있다는 걸 배우는 건 짜릿한 일이다. 게다가 가끔은 이런 기술적 분석 외에도 상대방이 공을 잡았을 때 수비수의 시선에서 읽어 낼 수 있는 심리라든가 , 무리한 파울을 하는 선수들의 무의식 같은 걸 이야기해 주기도 한다. 이렇게 쉽고 명확하게 설명 잘하는 사람이 평소에는 대체 왜 , 라는 생각은 거두기로 하자. 그는 이 시간만큼은 내게 최고의 명장이니까.


의미 없어 보이는 것들 속의 것을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나부터가 나아가야 한다.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경기가 시작되는 순간 , 축구가 아닌 건 없다는 것을. 시늉이든 시뮬레이션 액션이든 시늉레이션 액션이든 뭐든 , 피치 위에 올라서면 그 모든 게 다 진짜 축구였다. 모두에게 미안한 마음 , 그날의 정강이 상태 , 나의 사소한 기분 같은 것들도 고스란히 축구의 한 부분이 되었다.

물론 축구 경력으로 따지자면 나는 이제 막 신생아를 벗어난 수준의 꼬맹이가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언니들이 “앗 , 혼비 앞에서 이런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라는 말을 “앗 , 내가 애들 듣는 데서 못하는 소리가 없었네!” 같은 어투로 말하거나 , 울기 직전의 아이를 달래고 어르듯 “혼비야 , 많이 놀랐지? 이제 괜찮아. 괜찮아.” 하는 것에는 도저히 적응이 안 됐다. 그럴 때의 그녀들은 마치 물리적 시간을 초월한 , ‘축구를 시작한 날이야말로 진정으로 세상에 태어난 날’이라고 믿는 축구 근본주의자들 같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동안 경기장 밖에서 오프더볼을 제일 능숙하게 잘했던 사람은 총무 언니였다. 팀원들이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마음 놓고 피치 위를 공과 함께 누빌 수 있도록 항상 부지런히 움직이며 자질구레한 일들을 맡아 처리하곤 했다. 나에게 “혼비야 , 놀랐지? 괜찮아.” 우쭈쭈쭈하는 전화를 제일 많이 한 사람도 총무 언니였다.

이렇게 총무 언니는 종이 위에 , 그리고 내 마음에 , 다른 팀원들 마음에 빈자리를 만들고 떠나갔다. 그렇게 못 만들어서 문제더니만 나가면서 ‘공간’ 한번 제대로 만들고 가네. 정말이지 총무 언니의 오프더볼은 문제가 너무 많다.

강철 체력이자 맨투맨 마크도 완벽해 마지않았던 박지성은 AC밀란과의 경기에서 전후반 내내 피를로를 철저하게 경기장에서 지워 버렸고 , 역시 체력하면 빠질 수 없는 AC밀란 수비수 가투소는 그걸 두고 “박지성은 마치 모기 같았다.”라고 극찬했다는데 , 나는 체력이 모기 같아서 망했다. 체력 자체가 이미 총체적으로 문제인 주제에 머리카락이 방해가 되니 어쩌니 했다니 내 잔머리들이 깔깔대고 웃을 일이다.

그랬다. 어떤 욕망을 이길 수 있는 건 공포가 아니고 그보다 더 강렬한 다른 욕망이었다. ‘축구를 잘하고 싶다.’라는 중요한 목표를 받쳐 줄 ‘축구를 잘할 수 있는 몸’에 대한 욕망이 무럭무럭 자라 기존의 욕망들을 압도했다. 그 어떤 종류의 몸보다도 두 시간을 전력으로 뛰어도 지치지 않고 , 상대 팀 선수들의 강한 압박 수비도 다 버텨 내는 “힘들어 죽겠어도 다리가 ‘지절로’ 앞으로 막 가”는 몸이 갖고 싶었다. 내 몸을 축구하는 데 최적화된 상태로 만들고 싶었다. ‘예쁜 머리’보다는 ‘편한 머리’를 , ‘예쁜 몸’보다는 ‘강한 몸’을 갖는 것으로. 몸과 축구 사이에 다른 욕망이 끼어들 틈이 없는 완벽한 일대일 맨투맨의 관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