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 책 메모]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 김혼비
물론 축구가 대단한 것도 맞지만 , 사실 이게 다 책을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책에 ‘내 생애 첫 골을 성공시키는 순간’에 관한 에피소드를 꼭 넣고 싶어진 것이다.
축구에 관한 많은 책 중 단연 최고로 꼽을 만한 『축구란 무엇인가』에서 저자 크리스토프 바우젠바인도 말했다. 다른 구기 종목에 비해 유독 축구에서의 득점은 매우 힘들고 그래서 희귀하다고. “축구 규칙들은 골이 아주 적게 터지도록 만들어”져 있고 , “필드가 크고 선수가 많으며 공을 확실히 다루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은 모두 수비수에게만 이점”이며 , “여러 통계에 따르면 축구에서는 공격 행위의 극소수만이 득점으로 끝난다.” 그러니까 축구에서 골을 넣는 것은 매우 희귀하고 특별한 사건이다. 책의 엔딩으로 매혹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계속 슈팅 세례를 받다 보니 날아오는 공에 대한 공포는 어느 순간부터 한결 약해졌고 , 왼쪽 턱과 광대뼈 사이에 정통으로 공을 한 번 맞고 나니 그마저도 사라졌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에게 이런 종류의 공포는 발생할 통증 자체에서보다는 통증의 강도가 가늠이 안 된다는 사실 , 즉 정보의 공백에서 온다. 낯가리는 사람은 아픔에도 낯을 가려서 그래도 좀 알고 지내는 아픔이 잘 모르는 아픔보다 훨씬 대하기 편한 모양이다.
축구를 시작할 때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일 중 첫 번째는 할아버지들과 축구할 일이 많다는 것이다. 유도나 권투처럼 축구도 체급을 나눠 본다면 파워로 보나 체력으로 보나 20~50대 여자 팀과 60~80대 남자 팀은 보통 같은 체급으로 묶이기 때문에 (매우 드물게 30~50대 남자 팀과 경기 할 때도 있지만) 우리는 주로 같은 여자 팀 , 그다음으로 60~80대 할아버지로 구성된 시니어 팀과 경기를 꾸준히 해 오고 있다.
그 이후에도 계속 같이 뛰었고 밥도 같이 먹었고 몇 번의 스로인도 더 했을 텐데 , 제대로 인지하지 않은 존재는 기억에 새겨질 자리가 없다. 슬프게도.
사실 나는 경조사에 단체로 돈을 걷는 문화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나의 같은 사건이 사람들에게 가닿을 때는 제각각 다른 모양의 그릇이 된다. 모양 따라 흘러 담기는 마음도 다르고 그걸 세상에 내미는 방식도 다르다. 아무것도 안 담겨서 내밀 게 없는 사람도 있다. 그걸 무시하고 몇 명이 주도해서 ‘사람이라면 이렇게 하는 게 당연한 도리다.’라고 자신의 개인적 신념을 일반화시켜 타인의 도덕관념을 자극하는 방식이 싫다.
축구뿐 아니라 유니폼을 입고 하는 모든 팀 스포츠들이 그렇겠지만 , 때로 유니폼의 커다란 가시성은 그 안의 개인을 지나치게 비가시화한다. 한 사람의 고유한 개성이나 인격이 유니폼에 박힌 번호 뒤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사진들 속에서 등 번호와 얼굴을 함께 볼 수 없는 것처럼. 뒷모습은 앞모습이 아니니까.
그때부터 한 명씩 특훈에 얽힌 기억을 시작으로 현역 시절 이야기들을 조심스럽게 꺼내 놓았다. 프로 축구의 세계나 한국 스포츠계의 현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내게는 꽤 놀라운 일들이었는데 , 또한 놀라웠던 건 나에게 놀라운 일이 그들에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냥 대부분 ‘그래 , 운동하려면 어쩔 수 없어.’의 영역에 들어가는 ‘보통’의 일상들이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에는 다 같이 웃었지만 , 어떤 이야기에는 나는 웃지 못했고 , 어떤 이야기에는 다 같이 울었지만 , 어떤 이야기에는 나 혼자 울었다.
폭력의 대물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