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 책 메모] 역사의 역사
역사의 역사 - 유시민
랑케는 ‘도장 깨기’를 이어가는 무협 소설 주인공처럼 유럽 주요 도시의 문서보관소 문을 열었다. 불온한 혁명의 기운이 낡은 세상을 뒤흔든 시기에, 유럽의 주요 언어에 통달한 역사학자가 군주정 국가 권력자들의 호의에 힘입어 주요 도시의 문서보관소를 뒤졌고, 거기서 찾아낸 문헌 자료를 활용해 유럽의 왕조와 민족과 교회와 교황의 역사를 서술했으니 어떤 유럽사 연구자가 감히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있었겠는가? 문서고 이용을 허락한 것을 두고 메테르니히가 “영원한 공적을 세웠다”고 할 정도로 랑케는 드높은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이 복음은 과학 기술과 물질의 힘은 진보하지만 인간 정신은 진보하지 않는다는 특유의 역사철학을 담고 있는데 역사가로서 랑케가 범한 중대한 오류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했다. 랑케는 문명의 진보를 절반만 인정했다. 그에게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 것과 진보하는 것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인 옷감과 같았다. 씨실은 도덕이고 날실은 물질이다.
문명과 신학의 결합으로 물질만을 문명이라 보지 않았다. 중대한 오류란 뭘까?
배리법은 어떤 명제의 부정(否定)이 모순임을 증명함으로써 그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다
군주제 국가는 랑케의 연속 강의 이후 7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지구 표면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졌으며 인류 문명의 향방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몇몇 국가에서 겨우 잔명을 유지할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국민주권은 19세기 유럽의 명백한 ‘지도적 경향’이었다. 괘종이 무엇을 쳤는지 알지 못한 사람은 공화주의자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군주정을 옹호한 랑케 자신이었다. 그는 역사학자였지만 신학에 눈이 가렸다. 역사학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신학은 그렇지 않다.
가장 유명한 것이 첫 저서 『1494년부터 1514년까지 라틴족과 게르만족의 역사』 서문인데, 여기에는 그가 쓴 역사서를 다 합친 것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역사가들을 사로잡은 문장이 들어 있다. 랑케의 시대에 막강한 위력을 떨쳤던 그 문장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한동안 유럽 역사학계를 지배했으며 지금도 그 힘이 다하지는 않았다. 흔히들 과거를 평가하고 미래에 대비하도록 사람들을 일깨우는 것이 역사 서술의 과업이라고 하지만 이 책은 그처럼 고매한 과업을 추구하지 않는다. 이 책은 단지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wie es eigentlich gewesen)’ 보이려 할 뿐이다.
어떤 시점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눈으로, 심지어 그 모든 역사적 사료들의 주관도 걷어내며 해야하는데 가능하기나 할까. 소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의 선택은 역사가의 주관적 판단 영역에 속하며, 역사가의 주관은 개인적 기질, 경험, 학습, 물질적 이해관계, 사회적 지위, 역사 서술의 목적을 비롯한 여러 요인이 좌우한다.
그렇지만 랑케의 역사 이론은 역사가에게 명분 있는 도피처를 마련해 주었다. 과거를 평가하는 일에서 손을 떼고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도록 동시대인을 일깨우는 과업을 외면하면, 역사가는 역사 서술 작업에 따르는 정치적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역사가의 의견이 들어가길 배제한 랑케의 말은 의견을 걷어내는데만 집중하고 다른 그 무엇도 챙기지 않아도 될 안일한 명분이 되었다. 객관성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불가능한 과업이었으니 다른 걸 챙길 여유도 없긴 하겠다.
그런 점에서 랑케의 역사학에 대한 수많은 비판 가운데서 가장 아픈 것은 아마도 철학자 니체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아닐까 싶다. 그들은 사건을 거울처럼 그대로 반영하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목적론을 거부한다. 더 이상 어떤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판사 역할을 맡는 것도 경멸한다(이 점에서 그들은 수준 높은 취향을 보여준다). 그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저 확인하고 묘사할 뿐이다. 이 모든 것은 매우 금욕적이다. 근대 역사가의 시선은 슬프고 완고하며 단호하다. 그 시선은 북극의 고독한 탐험가보다 더 고독하다. 그곳엔 눈밖에 없고, 생명체의 낌새라곤 전혀 느낄 수 없다.14
철학자의 임무는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변혁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그는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이 무엇이며 어떤 조건을 충족할 때 사회가 질적으로 변화하는지 탐색한 끝에 인간 사회의 발전 과정 전체를 지배하는 역사법칙을 찾아냈다고 주장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폭력으로 국가 권력을 장악해 계급 제도를 타파하고 국가를 소멸시킴으로써 종국적으로는 역사 그 자체의 종말을 실현하는 공산주의 혁명이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봉건 사회가 몰락함으로써 출현한 현대의 부르주아사회는 계급 대립을 폐지하지 않았다. 낡은 계급과 낡은 억압의 조건, 낡은 투쟁의 형태를 새것으로 바꾸었을 뿐이다.
인간 공동체를 이런 관점에서 바라본 역사가는 일찍이 없었다. 사회를 대립하는 계급의 통일체로 보고 그들의 투쟁과 그 투쟁이 초래한 사회의 변화 과정을 역사라고 할 경우, 왕과 왕조, 국가, 민족을 중심으로 서술한 그때까지의 역사는 모두 반쪽짜리가 된다.
유물론은 물질세계가 인간의 관념과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보는 철학이다. 유물론에 따르면, 물질이 먼저고 인간 정신과 의식은 나중이다. 달리 말하면, 의식은 물질의 산물이다. 인류가 지금까지 발견한 과학적 지식은 이 관점이 옳다는 것을 분명하게 입증한다. 인간은 오랫동안 신이 우주와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믿음일 뿐이다. 진리인지 아닌지 검증할 방법이 없다.
사회가 대립하는 계급의 통일체이고 사회 변화의 동력이 대립하는 계급 사이의 투쟁이라고 할 경우, 계급과 계급 대립의 폐지는 곧 사회 변화의 동력 소멸을 의미한다. 변화의 동력을 잃으면 사회는 영원히 같은 상태가 지속되는 ‘천년왕국’이 된다.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역사의 마지막 사건을 통해 인류 역사는 공산주의 사회라는 최종 단계에 들어가고 역사는 종말을 맞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된다고 해도 마르크스의 역사법칙이 진리가 되지는 못한다. 공산주의 혁명 이전의 사회에는 적용할 수 있지만 공산주의 사회에는 적용할 수 없다면, 그 역사법칙을 보편적 진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