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 중 완독한 책을 오늘 정리했습니다.

소설의 단락을 인용한 특성 상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므레모사 - 김초엽

1.

혹시 저들 중 누군가는 알고 있을까. 내가 다리를 떼어내고 싶다고, 움직임을 멈추고 싶다고, 몸을 부수고 싶다고, 뇌로부터 신경을 분리해서 끊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12p

충동이 나를 부추길 때 장막 뒤에서 다른 무용수들이 뛰쳐나온다. 나는 순식간에 그들 사이에 섞여든다. 그러면서 여전히 그림자 다리와 함께 춤을 춘다. 도약하면서, 바닥을 구르면서, 허공을 가로지르면서, 손끝과 발끝으로 어떤 움직임을 표현하려고 애쓰면서. 그렇게 나는 마지막 기회를 놓친다.

12p

3.

“우리의 감각기관은 참 효율적이죠. 지속적인 자극이 반복되면 그걸 그냥 배경 잡음으로 처리해 버리니까요. 소음이 지속되면, 소음 자체를 감각 처리 기관에서 음소거해버리는 셈이에요. 냄새도 마찬가지고요. 아마도 이곳 사람들은 이 냄새의 존재를, 그리고 어떤 소리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거예요. 그것과 함께 너무 오래 살아왔으니까요. 하지만 그 배경 잡음은 절대 사소하지 않아요. 그건 이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죠. 그리고 때로 그것은 여행자의 시선으로만 포착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온 사람의 시선 대신에요.”


내부에선 알아차릴 수 없는 부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79p

“아무도 그게 함정인 줄 모를 거예요. 그리고 함정에 빠졌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고요. 자발적으로 구멍에 들어가거나 혹은 이 함정이 보물로 가득한 곳이었다고 떠벌려댈 겁니다. 어느 쪽이든, 우리는 부품이 될 거예요.”


사회의 시스템을 굴리는 방식도 아마 이런 식

81p

“왜 알면서도 이곳에 왔냐고요. 함정이라는 걸, 함정의 부품이 되리라는 걸 알면서… 와야만 했던 이유가 뭐죠?” “그 이유를 말해주면, 나는 유안 당신을 이 계획으로 곧장 끌어들일 텐데요. 그걸 감당할 수 있습니까?”

82p

4.

하지만 신경 의족에 익숙해지면, 뇌가 점점 이 기계를 진짜 다리로 인식하기 시작해요. 우리 뇌는 놀라운 신경 가소성을 갖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결국은 시간이 답인 거죠.

88p

그 과정에서 나와 한나의 관계까 재활 훈련사와 고객이 아닌 그다음의 단계로,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해나갈 때까지도 나는 한나에게 한 가지 사실을 숨겼다. 나의 그림자 다리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사실은 신경 의족을 연결한 부위 근처에서, 절단한 다리의 감각이 계속해서 느껴진다고. 마치 오른쪽 다리를 두 개 지닌 채 살아가는 것 같다고. 그 감각은 움직일 때, 격렬하게 움직일 때 더욱 심해지며, 견딜 수 없는 통증을 동반한다고. 나는 오랫동안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주입하는 프레임에 맞춰서 살아가고 숨기고 그런 척하는 삶은 두 개의 오른쪽 다리처럼 통증과 불가해함을 수반하는 걸지도.

89p

“솔직히 말하면, 예전만큼 춤추거나 움직이는 일이 기쁘지 않아. 사실은 움직임을 완전히 멈출 때, 가만히 있을 대가 가장 편안하게 느껴져. 이건 상실과는 다른 것 같아. 상실은 잃어버린 거지만, 나는 그냥…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거야. 일종의 ‘변신’을 경험한거지.” 나는 최대한 유쾌하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한나는 내 말에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유안, 마음을 잘 다잡아야 해. 지금 넌 회복되고 있는거야. 몇 년이 걸리건, 나아지고 있는 거라고. 잃어버린 것을 자꾸 의식하지 마. 움직임을 완전히 멈추고도 편안할 수는 없어. 우리가 쉴 때도 우리는 끊임없이 몸을 뒤척이잖아. 살아있는 건, 곧 움직이는 거야. 왜 ‘생동한다’는 표현을 쓰겠어?”

90p

하지만 그 생각은 계속해서 나를 찾아왔다. 특히 깊은 밤에, 내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침대 위에서 신음하다가, 문득 그 모든 통증들이 물러나고 나의 움직임도 근육도 고요해지는 어떤 새벽에. 고정된 것은 나를 편안하게 한다. 정적인 세계는 내가 돌아가야 할 고향이다. 어느 순간 나는 그런 생각을 도저히 멈출 수 없게 되었다.


모두가 움직이는 세상에서 멈춘 채 살아가기

91p

그들의 말은 분명히 이르슐어일 텐데도 마치 유안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이렇게 외치는 것처럼 들렸던 것이다. ‘제발 나를 데려가.’


유안이 ‘변신’한 것처럼 이들도 그렇게 되어버린 걸까.

98p

므레모사가 여전히 오염된 땅일 것이라는 추측도, 이곳의 주민들이 고통과 절망 속에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틀렸다. 마을은 적막했지만 동시에 나름의 방식으로 아름다웠다. 세상에서 가장 고립되었던 이들은 다시 자신들만의 생명력 어린 공간을 일구어낸 듯 보였다. 그 모든 것이 어떻게 간으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마을은 죽음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리고 유안은 그 사실이 몹시 실망스러웠다.


보편적인 모습, 틀에 맞춘듯한 모습은 마치 누가 짜둔 틀에 맞춰진 것만 같다.

103p

5.

강력한 암시와 조종을 걸어 정신을 무너뜨리는 것. 그게 핵심이에요. 그건 아주 달콤한 냄새를 풍겨요. 마치 꿀벌을 유혹하는 꽃처럼 인간을, 동물들을 끌어들이는 거예요.


온갖 달콤한 것들이 우릴 고정된 세계로 이끈다.

121p

대화 속에서 기시감이 느껴졌다. 활력과 생동감. 죽음의 땅이 아닌 삶의 터전. 함정에 빠지는 것. 마침내 그 함정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이 되는 것…

134p

6.

오래전 이곳으로 돌아온, 바깥세상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만큼 변이된, 그리하여 그들의 원래 고향을 차지하고 그 자리에 고정되어 움직임 없는 삶을 이어가는, 므레모사의 진짜 귀환자들.


멈춘다는 것은 생동하지 않는다는 것.

164p

7.

“유안 씨, 그거 알아요? 그곳의 귀환자들은 아예 치료도 거부하고, 움직임도 포기하고 침상에만 누워 살아간대요. 구호단체들이 그렇게 지원을 많이 보냈는데도, 좀처럼 나올 생각이 없다고요. 그에 비하면, 유안 씨는 얼마나 대단하고 훌륭해요. 도와주겠다는 손길이 그렇게 많은데, 다 포기하고 게으르게 누워만 있다니. 정말 너무 한심하지 뭐예요.”


멈춘 것을 틀린 것이라 규정짓는 오만함

169p

한나는 도약하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도약을 멈추고 싶었으므로 우리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172p

그곳에서 나는 놀랍고 끔찍한 것을 보았다. 움직이는 것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경배하고 있었다. 움직이지 않지만 살아있는 것들을 위해 복종했다.


틀린 것이 옳은 것이 된 세상

175p

내가 바라는 건 죽음이 아니었다. 나는 삶을 원했다. 누구보다도 삶을 갈망했다. 단지 다른 방식의 삶을 원할 뿐이었다.

175p

“모두가 므레모사에 그러려고 왔죠. 도움을 베풀러 왔고, 구경하러 왔고, 비극을 목격하러 왔고, 또 회복을 목격하러 왔어요. 그래서 실컷 그렇게 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행복한 결말 아닌가요?”


한 쪽이 진실, 프레임을 옳은 것으로 규정한다. 즉 권력. 친절에도 관계에도 늘 권력이 있지.

179p

작품 해설. 시간의 살, 므레모사 - 김은주

수전 손택은 SF가 영화와 만났을 때 “예술의 가장 오래된 주제 가운데 하나인 재난”을 재현하며, 구경거리 위주의 형식을 취하면서 곤나과 재난에서 미적인 쾌감을 즐기게 한다고 설명한다.

192p

확실히 목격한다는 것, 본다는 것, 다시 말해 목격 가능한 위치는 재난에서 일정 거리 떨어져 있다.

193p